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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irit of Truth – 진리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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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irit of Truth – 진리의 영

아더 캐츠, 폴 폴크 공저

임은묵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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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서론

1 장 – 진리 안에서 행함

2 장 – 진리, 변화시키는 힘

3 장 – 진리 안에 살도록 창조되다

4 장 – 진리의 성령

5 장 – 성품과 품행 안의 진리

6 장 – 절대 진리와 거짓의 영

7 장 – 진리: 정직한 영

8 장 – 겸손: 진리의 길

머리말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당신과 나의 경험에 의하면 교회에 대한 근본적 묘사인 이 구절이 사람들에게 좀처럼 인식되어지지 않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단체들 중에서 교회가 가장 딱딱하고 알아듣기 힘들고 진부적이다. 당신은 진리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피상적인 굴종의 유형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열심이 요구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가?

당신이 읽게 될 이 에세이는 내가 어느 주일 아침에 한 설교자가 증거하는 설교를 듣기 위해 그 교회에 참석한 계기를 통해 발단되었다. 나는 나를 호위하던 한 형제와 함께 큰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가벼운 걸음으로 그곳에 갔다. 나는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의 발코니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메시지가 들려지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에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성도들 가운데에는 경솔한 십대의 무리들이 함께 했으며, 장년 성도들 가운데에 흐르고 있던 종교적 분위기와 기쁨이 없는 인상들을 보면서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메시지가 시작되자 나는 그 설교자의 열정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예리했으며 정확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의 내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로 가득했던 것일까? 그가 전하는 모든 말을 듣고 있던 중에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이 불쾌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딜레마에 부딪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그 메시지가 겉보기에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나의 영혼은 그의 메시지의 모든 음절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근본적인 헌신과 희생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이 메시지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설교일 뿐입니다. 제가 매주마다 성경적인 메시지를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좋은 것들을 예비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 여러분도 저에게 뭔가를 강요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는 다같이 명성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속에서는 “진리는 완전한 진리이다. 완전한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올라왔다. 헌법을 말하는 사람은 그 헌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이 된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나의 심장을 꿰뚫고 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왕상 17:24)

 

당신은 나와 함께 이 책을 저술한 폴 폴크에 대해서 알 기회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폴과 나는 이곳 북 미네소타 주에서 수년 동안 함께 사역했다. 이곳은 우리가 믿음에 대한 쟁점들을 가지고 오랜 세월 고심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지성적 성향으로나 학적 성향으로나 유대인들이다. 우리는 유대 문화와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믿음을 갖고자 노력했으며, 할 수 있는 대로 순수한 것을 바라보고 선전하고자 했다. 폴보다 나의 마음을 예리하고 명쾌하게 해석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책은 두 생각들과 마음들과 영들의 통합체이다. 이 책은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진정한 합체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당신으로 하여금 어둡고 혼미한 거짓의 시대 속에서 진리의 사랑을 다시 불붙게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되기를 바란다.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본디오 빌라도의 냉소적인 영과,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시대의 영은 점점 더 퍼져나가고 있다. 거짓이 진리를 거스리고, 심지어는 진리를 소멸할 수 있다는 태도와 확신은 세상에 만연하고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희생이 따르지만 이것만이 유일하게 이 시대를 해독할 수 있다. 진리이신 주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진리를 희구하고 소망하도록 감동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진리를 순종하고 증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진리를 좇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원한다. 그렇게 될 때에 어그러진 세상 속에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를 동경하기를 바란다. 제시 펜-루이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을 처음 경험하고 알게 될 때에 그분은 진리의 영으로서 다가오신 다고 말한바 있다.

아더 캐츠

라포테, 미네소타

 

서론

 

진리의 성령

“진리가 무엇이냐?” 본디오 빌라도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물어본 일이 결코 없었다. 빌라도의 질문을 들었던 분은 이 질문에 대해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셨지만, 어느 누구도 이 침묵보다 더 완전하고 명확한 대답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묵묵부답 하셨던 것일까? 현대인들이 이와 동일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을 때에 어찌하여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려고 그리도 안달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진리와 정확무오한 교리들보다도 훨씬 더 잘 정립된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빌라도에게 매우 인상적이며, 꽤 성경적이고 정확한 진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시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빌라도가 이 질문을 하기 이전에 부딪혔던 논쟁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명확한 대답을 주셨다. 그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우수한 종교적 사고들을 반박하여 논쟁하고 격론할 수 있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 앞에 서셨던 예수님, 즉 논쟁에 정통한 분이시며 최상의 성경적 논객이셨던 분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분의 침묵은 진리를 아는 지식이 부족한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분은 진리를 충만히 소유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침묵하신 것은 진리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가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한마디의 진리가 발언 되어지는 순간에 살아있는 진리이신 그분 자신이 약화되었다. 만일 빌라도가 자신 앞에 침묵하며 서 계셨던 진리를 보지 못했었더라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무언가를 결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종종 침묵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들 속에 진리가 없어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말씀해주셨다. 그분은 빌라도가 물었던 질문을 우리에게 대답해주셨다. 하지만 그분의 대답은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던 것 만큼이나 당혹스럽고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분은 “내가 곧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진리가 정확한 대답들의 골자보다 더한 것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진리는 영이요, 생명이다. 그리고 영과 생명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진리는 소유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만 원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진리로 충만케 하려 하시는 것이 그분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를 진실되게 만드시는 것이 그분의 원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심령 속에 부어 주시는 보혜사, 즉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고 생소한 땅에 남겨 놓으셨다. 우리는 교리가 진리가 되어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내가 곧 진리요”라고 말한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리를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지만, 진실된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소유와 행함으로 가득찬 종교를 믿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리를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교는 단순히 행하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습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소망 되어질 때에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게 만들기를 원하신다. 이 두 개념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또한 각 개념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도 굉장한 차이가 있으며, 각각 다른 결과를 만들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소유는 존재다’라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속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한 존재가 되려거든 단순히 충분한 양의 진리를 소유해야 한다는 개념을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속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교리가 무오하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짓된 것을 따라 본받는 삶을 산다. 만일 한 과부가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왕상 17:24)고 엘리야에게 말할 수 있었다면, 엘리야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라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입과 음성은 이것에서 나오는 말과 분리되지 않는다. 음성과 말은 중단 없는 연속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중요한 것이지만, 만일 우리 안에 계시는 진리의 성령이 이것을 작용하게 하시지 않으면 이것은 단지 돌에 새겨진 율법처럼 죽이는 것이요, 치명적인 것이다. 율법이 아무리 정확히 인용되어진다 해도 이것만 가지고는 우리를 의롭게 만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통적 신앙을 고백한다 해도 진리 홀로 우리를 진실되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율법의 목적이며 율법의 성취이듯이, 또한 그분은 하나님의 진리의 목적이며 진리의 성취이시다. 바울과 같은 바리새인을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살아있는 편지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진리의 살아있는 증거가 되게 하실 수 있으시다.

이 짧은 글은 일반적인 성경적 진리의 해석과는 다소 다르게 쓰여졌다. 원컨대, 이 책은 진리에 관하여 말하는 다른 책보다 더 나은 책인 것을 증거할 것이다. 이 책은 수일 간 회중들에게 전달 되었던 메시지들을 정리하여 묶은 것이다. 이 메시지들은 모든 진리의 본질이신 진리의 성령님을 나타내기 위해 전해진 것들이었다. 발언 되어진 진리를 글로 옮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전달되어진 진리의 영을 실어 나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말과 영에 있어서 진실되게 쓰여졌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없는 삶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기 위해서 쓰여졌다. 만일 이 책이 단순하게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이 책의 목적성취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책을 사용하셔서 독자들의 삶을 변화 시키신다면 이 책이 쓰여진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은 일관되게 진리를 영(spirit)이라고 반포할 것이다. 진리는 말씀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말할 것이다. 실로 진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진리는 우리의 존재의 본질이다. 진리는 말 이상의 것인 동시에 말보다 위대하다. 우리는 점점 더 진리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진리는 교회에서도 믿음에 대한 여러 교리들을 가지고 논쟁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교회가 점점 더 연합하는 이 시대에 교회를 분열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를 원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순전한’이라는 단어를 “교리”라는 단어 앞에 붙이므로, 그러한 논제는 취급해 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순전한”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의 진리는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선포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진리의 말씀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진리의 성령이 찬양 되어져야 한다. 생명 없이 선포되는 진리는 오히려 해가 된다. 이 책은 모든 진리를 위한 외침이다. 만일 진리의 성령이 부분적으로만 드러나서 거짓 진리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면 그것은 비극이다.

 

폴 포크                                세인트 폴, 미네소타

제 1 장

진리 안에서 행함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요삼 2-4).

 

더 즐거움이 없도다

어찌하여 요한은 진리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묘사할 수 있는 모든 표현들을 다 제쳐놓고 ‘행함’(waking)이라고 하는 용어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요한을 더 즐거움이 없도록 만들었던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의 언어에서 이 용어보다 더욱 고상하고 영적인 표현들이 사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행함이라는 말은 흔한 것으로써 매우 통상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아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결코 고상하거나 고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적절한 용어이다. 행함은 매일매일 인간의 삶의 모든 측면에 진리를 가져다준다.

우리가 냉장고를 향하여 걸어가든지 혹은 강단을 향하여 걸어가든지 행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것의 일부분이다. 우리의 삶을 묘사해주는 용어들 중에서 “행함”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적절한 용어는 없을 것이다. 요한이 이 용어를 선택해서 진리와의 관계를 묘사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도 그분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보실 때에 즐거워하신다는 말씀을 덧붙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에 대해서 박식하면서도 자만과 속임과 거짓 안에서 행한다면 그분께서 슬퍼하시지 않겠는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어쩌다가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비록 이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연히 혹은 생각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한번에 한걸음씩 걷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 안에 거하든 비진리 안에 거하든 그것은 순간순간 그의 선택에 따라서 결정지어진다.

성경을 정확하게 인용하거나 바른 교리들을 인정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행함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옳은 말을 하면서 거짓된 태도를 보이므로 자신이 한 말에 상반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당신이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당신의 지성은 “진리야!”라고 말을 하면서도, 당신의 영혼은 “거짓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할 때에만 참으로 진리는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이며, 또한 우리도 진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 진리를 나타내라

앰플리파이드 성경은 바울이 에베소서에 기록한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으로 진리를 나타내고 진실되게 말하고 진실되게 처신하며 진실되게 살지라”(엡 4:15). 진리 안에서 행함에 대한 의미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구절들은 별로 없다. “모든 것”이라 함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것에 국한하면서 여전히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를 이룰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음매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조각으로 이루어진 쪽매붙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분류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정신건강과 육체건강과 믿음과 교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각각의 원칙과 규칙을 가지고 서로 분리되어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위험스럽게도 우리 자신들의 본질이 단편적인 것인 양 오해하고 있으며,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 당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의 본질을 곡해하는 것과 진리의 본질을 신학교리와 사상에 관련시키려 하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진리는 온 세상에 전파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사용하여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나타나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가 되지도 않는다. 진리와 및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말이나 교리에서 진리를 제한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산산조각난 존재요, 내부적 반목과 반대 주장들이 가득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비진실된 존재로 취급하게 된다.

행함이란 두 발로 걷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온몸으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몸이 걷지 않는다면 신체 중 어떤 지체도 걸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 진리를 나타내라.”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사용해서 진리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모든 진리를 나타내는 것일까? 우리는 참된 진술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두적 표현들은 단지 진리의 결과에 불과하다. 진리는 삶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나타나져야 한다. 우리는 진리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리는 그 영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요한을 즐겁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서지 못하듯 스스로 분쟁하는 사람은 서지 못하게 된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에 앉아 있던 한 남자에게로 다가가셨다. 그 남자는 과거 38년 동안이나 육체의 장애를 지니고 있던 자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와 동일한 질문을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우리 가운데에는 38년 혹은 그보다 긴 세월 동안 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자들은 “바른” 지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 안에서 행할 수는 없는 자들이다. 사람이 진리의 성령 안에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이 온전해져야 한다. 당신은 온전케 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오셔서 그러한 질문을 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의 건강이나 예금계좌 보다도 훨씬 중요한 전인격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측연선(測鉛線)처럼 내려져서 모든 모순된 것들을 바르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가? 우리는 모든 거짓된 것들이 제거 되어서 진실되게 말하고 진실되게 행하며 진실되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행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참된 길과 생명 안에서 행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온전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진리의 길로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더 많은 진리를 저에게 주세요!”라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를 진실되게 하세요! 당신의 이름을 경외할 수 있도록 제 마음에 교훈을 주세요!”라고 부르짖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결혼생활과 사역과 노동과 예배생활에 모순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다. 그의 옷장과 약 상자와 얼굴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온전함과 실제는 그 자체가 진리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될 때에 그것은 드러나게 된다. 내적 삶과 외적 삶이 하나가 될 때마다 진리는 밖으로 표출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무거운 짐을 벗은 삶이 진리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직장에 있을 때나 교회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정도의 진리를 원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정도의 구원을 원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정도의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가? “나는 진리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온전히 진실하게 행하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것은 마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분을 온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진리를 향한 우리의 사랑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입 시키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리도 우리에게 그 자체를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우리 속에 스며들게 된다. 우리가 진리를 원하고 그것 안에서 행하기를 바라는 만큼 그것은 우리 속에서 살아 있게 된다.

 

은도금 된 그리스도인

예전에 쓰이던 은화[銀貨]는 진짜 은으로 만들어졌었다. 그 동전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 동전을 바닥에 던져서 부딪힐 때 나는 소리를 들어보면 진짜인지 모조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그 동전이 모조품이거나 혹은 은도금 된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외관상 진짜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둔탁한 소리를 내게 된다. 반대로 진짜 은화는 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은화만의 독특한 소리를 내게 된다. 진짜 은화는 비단 외관상으로만 은색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은화로써의 기능을 한다. 모조품이 겉으로는 진짜 은으로 입혀져 있을지라도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은화는 겉이나 속이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은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은도금 된 그리스도인들”이 수다하다. 우리의 삶의 표면에는 참된 진리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매우 성경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제 형편, 즉 우리의 내적 사람의 실제 상태는 드러나지게 된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얼마나 정확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땅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에 의해서 구분되어진 것이다. 우리가 땅에 내동댕이쳐지거나 기대치 못했던 상황과 역경과 시험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될 때에 과연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의 삶이 집에서나 직장에서 또는 혼자 있을 때에나 다른 사람이 보고 듣는 곳에 있을 때에도 진실되게 울리는가? 우리의 내면에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겉과 속이 공히 은인가, 아니면 겉만 은으로 입혀져 있는가? 다윗은 시편에서 진리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묘사했다. 다윗은 하나님께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6)라고 말씀 드렸다. 다윗은 먼 훗날 요한이 말한 바를 그 당시에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은 그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다윗의 거짓된 행위

다윗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고통스러운 마음을 시편 51편에 기록하였다. 이 이야기는 흔히 알려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간음죄를 회개하는 대신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임 당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나단 선지자는 다윗을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는 다윗에게 한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매우 간접적으로 접근했다. 나단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어린 양을 잡아야 했던 한 부자가 가난한 이웃의 귀한 어린 양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다윗에게 연관시켰다. 다윗은 정의심이 일어나자, 분노하면서 그 부자를 혹독히 심판했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5-6). 나단이 다윗을 향하여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책망했던 시점은 바로 이 때였다.

다윗이 죄를 범했던 시점과 나단이 다윗을 책망했던 시점 사이에는 상당한 공백이 있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다윗에게 즉시 보내시지 않았던 것일까? 어찌하여 그분은 다윗이 죄악을 저지르도록 방관하셨던 것일까? 그 대답은 다윗의 마음에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그는 밧세바와 날마다 맺은 성관계를 드러내지 않고서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날마다 활동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다윗은 몹시 불의하게 행동했었다. 그는 나단의 비유에 등장한 부자의 불의를 향하여 엄청난 분개를 터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다윗은 열렬한 정의수호자였던 동시에 불의한 자였다. 우리는 종종 다윗이 나단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에게 극한 분노를 터뜨렸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분별하는 데에는 빠르고 열렬하다. 우리는 내적으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 안에서 살지 않으면서도 외적으로는 열렬한 “진리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 나단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에 다윗은 내적 사람과 외적 사람 사이의 불화가 드러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정의를 위한 불타는 열정 가운데에서 불의의 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으로 하여금 깊고 온전한 회개를 하게 한 근원이었다.

 

가장 깊은 내면의 존재 속의 진리

우리는 나단과 같은 사람들을 더 보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단과 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실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위선적인 이웃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깊은 내면의 존재 속에 진리가 거하기를 원하시며, 숨겨진 영역들 속에 지혜가 거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만일 진리와 지혜가 우리 속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떠한 외부적 신앙 고백을 한다 해도 우리는 거짓된 자들이다. 진리는 영이다. 이것은 먼저 우리의 영과 마음과 가장 깊은 내면적 존재에 작용되어진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진리의 성령 안에서 걷는 것과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걷는 것을 말한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되게 말하고 진실되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마음의 표현과 명시가 진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말을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감동을 받지도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이것이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우리를 만족케 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 주위에 있는 회의적인 비그리스도인들이나 그렇게 하도록 놔두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분적으로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진리가 너희를 부분적으로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진리가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인 줄을 선천적으로 알고 있다. 거짓은 우리를 부분적인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거짓은 우리를 경험적인 노예로 만든다. 왜냐하면 거짓은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는 영의 세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적어도 거짓보다는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진리가 거짓보다도 약하고 희미한 것일까?

 

말씀, 능력, 그리고 큰 확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5)

 

사도 바울의 전한 말씀은 능력으로 나타났다. 이는 그의 삶은 사람들 앞에서 진리의 현시였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증거한 진리의 말씀에는 능력과 큰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정도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찰스 피니가 뉴욕 주에 있던 한 직물공장에 방문했을 때에 한 사건이 일어났다. 피니는 공장 안을 거닐다가 직기를 운전하고 있던 한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설 때에 그녀는 하던 일을 멈췄다. 피니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 그녀는 서서히 몸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피니가 더욱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는 폭포 같은 눈물을 쏟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때에 피니는 그녀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에 반대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하여도 우리의 마음은 전혀 감동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자를 회개케 했던 인물이 있는가 하면, 많은 말을 하고도 우리의 마음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진리는 우리 안에 거한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 안에 거한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정도에 따라 대답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제 2 장

진리, 변화시키는 힘

외관상의 모습이냐 내부적 본질이냐

영으로서의 진리 안에서 행함은 비단 우리 개개인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인 이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진리가 우리의 입으로 고백 되어지는 것 정도로만 취급될 때에 교회도 역시 같은 진리를 고백하는 개인들이 모인 모임정도로만 취급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오로지 진리 안에 거하기를 바라고 있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진리가 말과 교리 이상의 것이라면 교회와 성도들은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서 진리 안에서 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교회의 영적 상태는 교인들의 영적 상태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우리 자신보다 더 참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지구 상에서 가장 진실된 사람들이 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위선과 자기 기만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진리에 주리고 목마른 남녀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지게 하는 것은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말들이 전해지는가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이 더불어 진리 안에서 순간순간 행할 때에 되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교회에 대한 것들을 속속들이 캐내려고 예리하게 판단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우리 자신의 주의를 더욱 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가짜 분별법을 익히 알고 있다. 그들은 허세로 가득찬 세상에서 매우 잘 훈련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편의와 이익과 부정직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무엇이 피상적인 관계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세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교회에서 찾지 못한다면, 만일 그들이 교회가 돈과 권력을 취급하는 방법과 세상이 그것들을 취급하는 방법이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아무리 자신들에 대해서 진실되다 해도 그들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할 것이다.

한 개인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듯이 교회도 역시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 교회는 가장 정통적이고 근본적인 교리 위에 설 수 있다. 교회는 축복과 형통의 표적들을 풍성히 받을 수 있으며 많은 물질을 소유할 수 있다. 교회는 심지어 영적 은사들의 현시들을 내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내부적으로 속임수와 회피와 피상적인 관계와 마음에도 없는 사랑과 무언의 적개심을 품으며 거짓된 것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뿌리 내리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외관상의 형편을 따라 진리를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우리의 진실한 영적 형편을 따라서 진리를 평가하기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내와 관용과 헌신, 그리고 사랑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이 우리가 교회임을 나타내준다. 아무리 우리가 교회에서 “아멘!”과 “하나님을 찬양하라!”와 “할렐루야!”를 많이 외친다 해도 그것으로 진실한 교회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과 진리

진리가 사랑과 함께 존재할 때에 개인과 교회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의견에 대해서 강한 반박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사랑이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사랑이 부족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이 진리와 연결되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필사적으로 사랑을 희구하며, 사랑을 구하기에 집착한다. 음악과 문학과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사랑에 대한 말들이 그칠 새 없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더욱 저속해져 가고,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더욱 병들고 있으며, 더욱 외설적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항상 사랑을 추적[追跡]하지만 결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이 일컫는 사랑이란 중압감과 생명력 없는 의무로의 쇠퇴와 음욕과 감상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세상은 진정한 사랑을 소유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랑을 찾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진리의 영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심령 가운데 심어주시는 분이시다.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서 사랑을 구하려 하는 것은 세상의 본질이다. 세상은 진리에 대한 대가를 치루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은 사랑을 열렬히 구하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진리와 사랑 중에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진리로부터 등을 돌릴 때에 사랑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가 진리의 성령을 멀리하면서 비교인들보다 더욱 순전한 사랑을 찾을 수는 없다. 요한이 기록한 두 번째 서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요이 1-3).

 

최후의 만찬 시에 예수님의 품에 머리를 기댔던 사랑의 사도는 이 세 구절 안에 진리라는 말을 네 번씩이나 언급했다(“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를 NAS에서는 “Whom I love in truth”라고 함 – 역자주). 하나님과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과 진리는 서로 잘 어우러져 있으며, 그것들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잘 스며들어있다. 그러므로 사랑과 진리는 우리에게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요한은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요”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이러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만일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방법을 찾고자 매우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로부터 위협을 느낀다. 우리는 진리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결혼생활과 이웃관계와 교회생활의 벽을 쌓아서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교회와 가족과 이웃은 서로 충돌을 피하려고 하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거짓된 위안과 피상적인 치유 그리고 허술한 합리화와 변명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찬 포옹을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에게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모든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매우 잘 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에 대한 굶주림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진리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일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므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진리로부터 보호한다 해서 사랑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을 근절하는 행위이다. 오직 거짓만이 진리를 가로막는다. 진리에 대한 수많은 말씀을 전했던 사도 요한, 즉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던 자에게 진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요한은 심지어 자신을 일컬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라고 말했다.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라는 점이 진리와 연관이 있었을까?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사랑이 요한으로 하여금 진리를 사랑하도록 만들었을까? 요한의 머리는 결국 예수님의 가슴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두려움과 외로움은 사라졌다. 사랑의 띠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이로 인하여 아무 것도 그들의 관계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어떤 방어막도, 어떤 외식적 행위도, 어떤 비밀스러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됐다. 그들은 또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하다면, 만일 우리가 여전히 거짓되고 가식적이라면, 과연 누구의 가슴에 우리의 머리를 기댈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주님의 품에 우리의 머리를 필사적으로 의지하고 누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품에 눕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은 우리가 소유한 신학이 줄 수 없다. 또한 진리 안에서 행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도 대답해줄 수 없다. 아마 우리는 차갑고 사랑 없는 빛이 진리인양 착각하고 있기에 너무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와 자비가 서로 만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시 85:10). 우리는 또한 진리의 성령은 보혜사(위로자)이시라는 것과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언제든지 치료의 광선을 발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말 4:2). 진리는 차갑거나 생기 없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자비이다.

 

깨끗케 된 영혼들

사랑이 없는 마음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진실함이지만 이것은 가장 무시되고 경시되어졌다. 그렇지만 많은 진리를 축적한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랑을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고 우리를 더욱 진실되게 만들 수 없다면 그것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랑은 오로지 진리가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어떠한 말들이 전해진다 해도 사랑은 가식적이고 거짓된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진실되게 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기만이며 거짓된 행위이다. 베드로가 이것에 대해서 표명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1:22). 거짓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 먼저 깨끗케 된 영혼이 되어야 한다. 거짓 없는 사랑은 지성을 포함하면서도 그것보다 훨씬 위대하다. 우리는 지성으로만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진리를 순종하므로 모든 거짓된 것들과 기만하는 것들을 깨끗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우리 속에서 다른 사람을 향한 거짓 없는 사랑이 넘쳐 나게 된다. 우리 속에서 진리가 그 정도까지 깊어지지 않으면 열렬한 사랑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 사람들은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이 다른 사람들이 지닌 사랑의 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순전한 진리와 진실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진리 안에서 거하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질문 해야 할 것이 있다. 한 흑인 형제가 백인 그리스도인의 옆집에 이사하거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할 때에 그 백인그리스도인이 흑인 형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잠재적인 증오와 표면적으로 시기심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붓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며, 교회 안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합창한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우리의 삶을 시험에 들게 하는 시련과 고난이 닥칠 때에 우리의 사랑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보고 싶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 안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수 없으시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가식적 사랑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장 깊은 내면적 존재 속에 거하는 진리만이 형제들에게 대한 거짓이 없고 뜨거운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논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사랑을 거스리는 원수 혹은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진리는 사랑을 위한 불가결한 필수 조건이 되어준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의 빛이 비추어진다 해도 증발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의 빛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사랑을 소실되게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불은 일시적인 것과 거짓된 것을 소멸하실 것이지만, 그 불은 영구적인 것과 진실된 것을 정케 하고 보존할 것이다.

 제 3 장

진리 안에 살도록 창조되다

가장 실제적이고 긴급한 필요

진리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호사[豪奢]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실제적이고 긴급한 필요이다. 우리의 몸이 숨을 쉬기 위해서 공기가 필요하듯, 우리의 영혼과 존재도 진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 우리 존재가 진리 안에서 살지 않을 때에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사는 환경 속에 있는 공해로 인하여 우리 몸이 손상 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며 숨을 쉬는 모든 것의 끊이지 않는 불순의 강물은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을 공격하고 있다. 진리의 영적 분위기가 부정직과 간사함과 거짓으로 인하여 오염되어질 때에도 동일한 결과가 나게 되는 것이다.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데에는 단지 적은 누룩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의 육체조직은 가식적인 것과 거짓된 것을 거부한다. 나는 음식을 먹을 때에 그것이 진짜 음식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다. 적어도 내 입으로 삼키는 것은 좋은 음식이어야 한다. 하지만 내 몸은 내 입보다 더 영리하다. 소화기에는 미각기관이 없기에 맛을 결정지을 수 없다. 소화기는 오로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진짜 음식물일 때에만 반응하게 되어있다. 소화기는 그것이 진짜 음식인지 아닌지를 틀림없이 알고 있다.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은 마치 소화기가 거짓된 것과 외식적인 것에 반응하는 것처럼 거짓이 없다. 내가 내 자신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아무리 말한다 해도 나의 속사람은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의 혼과 영은 비진리적이고 거짓된 음식을 거부하고 멀리한다. 우울증과 불안한 마음과 궤양과 신경쇠약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이 모든 것들이 가식과 부정직이 충만한 삶에 완전히 결부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 그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인식한다면 움츠러들지 않겠는가? 내가 가식적인 사랑을 할 때, 나의 기도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기도할 때, 혹은 예언의 말씀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언할 때, 나의 육체와 영혼에 어떠한 결과가 주어지겠는가? 모든 거짓은 우리의 생각을 무디게 만든다. 거짓은 우리의 감정을 혼동하게 한다. 거짓은 이것을 말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영혼을 무력하게 만든다. 비현실과 비진리의 분위기가 더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혼동될 것이다.

우리 주위의 세상은 진리의 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세상은 스스로 목을 졸라서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교회에서 진리를 교리의 영역에 제한 시킬 수 있다. 그리고는 진리 안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말하면서도 진리 안에서 살지 못한다면 점점 더 거짓의 영에 의해 상처 받은 피해자가 될 것이다.

 

외식의 누룩

진리에 대한 나의 이해가 바뀔 때를 같이 하여 다른 것들도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내가 비진리의 본질을 분별할 때에 사용하는 방법이다. 만일 내가 진리를 말이나 교리로써만 취급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비진리를 말과 교리로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다. 내가 진리는 영이라는 사실과 진리는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드러나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진리의 본질도 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누룩에 비유하셨다. 외식이란 비단 겉껍질이나 사물의 표면을 덮는 가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요소와 더불어 혼합되어진 내적 세력이기도 하다. 밀가루 반죽 덩어리가 겉만 발효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겉 표면은 누룩에 의해서 가장 나중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나의 내적 삶이 거짓되다면 나의 말이 진실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식적인 것이다.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은 진리를 등한시하고 거짓의 영인 누룩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행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영구적 경향에 대해 경고하셨다. 누룩이 우리를 진리 안에서 행하지 못하도록 할 때에 진리의 겉 표면은 가면(탈)과 거짓이 된다. 환언하자면, 외식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의 뼈를 덮는 회 칠한 무덤과 같다는 말이다. 만일 내가 진리 안에서 살아가지 못한다면 내가 말하는 진리가 나의 형편을 좋게 만들기는커녕 더욱 악하게 만들게 된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진리는 나의 말과 교리가 안으로부터 부패하여 거짓으로 변할 때까지 겉 표면 밑에 숨게 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 중앙에 있던 뱀의 거짓말을 믿었을 때에 단지 그들의 신학(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변질된 것이 아니다. 뱀의 거짓말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결과는 인간의 마음과 본질에 까지 뻗어나갔다. 인간의 모든 것이 누룩의 영향을 받았다. 즉 정치, 경제, 심리학, 종교, 일, 그리고 가정이 누룩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비록 진리와 객관성과 도덕성의 모든 외관상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해도 어떠한 것도 누룩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없다. 거짓은 본질적으로 늑대와 같아서 언제든지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두 왕국 간의 충돌

진리와 비진리가 충돌한다는 것은 말싸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논쟁을 이겨서 스코어를 올리려고 경쟁하는 사람에 의한 끊임 없는 논쟁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이것은 두 왕국 간의 충돌이다. 이 두 왕국은 삶의 양식과 사업의 양식과 아내와 남편의 관계 등의 영역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미묘하고 고루 퍼진 비진리의 영과 더불어서 홀로 싸울 수 없다. 거짓의 영을 대적하여 싸우려거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온전히 진리 위에 서야 할 필요가 있다. 진리가 증거 되어지면 사람과 교회는 새롭게 변화 받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옛 사람이 거짓의 표현인 것과 같다. 진리의 영이 성도와 교회를 세상의 반대되는 것으로 구별하신다. 그러므로 천국은 지옥과 구별되고, 새로운 피조물은 옛 사람과 구별되는 것이다.

진리가 거짓 가운데 거한다면 전도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복음은 처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고 하는 외침으로 전파되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수천수만 명의 영혼들이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고 외쳤으며,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어떤 능력과 권세가 진리의 말씀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심령에 비수처럼 꽂히게 했던가? 어떤 능력과 권세가 거짓과 속임과 어두움의 세력을 타파했는가? 사람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을 때에 그 외침을 들었던 사람들이 회개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간사함이 없는 새 이스라엘이 되어진다는 생동감 넘치는 말씀이 선포된 것이다. 나의 삶 속에 간사함과 거짓, 그리고 세상을 포로로 잡고 있는 거짓의 영의 모든 현시들과 및 이와 동일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면 나의 선포가 얼마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비진실과 거짓으로 당신의 숨을 막히게 하고 파멸시키려고 하는 모든 삶과 모든 인간성과 모든 세상에서 빠져 나오라. 죽음의 늪으로부터 나와서 생명으로 들어가라. 거짓의 덫에서 빠져 나와 투명함과 진리 속으로 들어가라. 착취와 탐욕으로부터 나와서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선포해야 할 아름다운 소식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말씀을 좀처럼 선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씀을 선포하지 않는 것은 통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원이 한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로 변화하는 것이고, 어두움의 왕국에서 빛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둘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이 날마다 경험되어진다면 어떤 말들을 사용하든 상관 없이 우리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전도가 피상적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피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전도가 기계적이며 추측이 가능한 것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믿는 자들로서의 우리의 삶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 선포가 단순히 구두적이거나 형식적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날마다의 행보에서 진리가 단순한 말과 신조로 변한 것을 나타내주는 확신한 표이다. 나는 내 자신이 거하지 않는 장소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진리를 선포할 수 있으며, 우리가 진리를 선포할 때에는 정확한 용어들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심령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선포[宣布]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삶이 진리의 영 안에 완전히 잠겨야 한다.

예수님은 올바른 말씀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매우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생명이 되게 하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그들은 이미 올바른 말씀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는 능력이란 무엇일까?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에게 전파할 말씀을 주시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기적들을 통해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하지만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우리는 증인이 된다는 개념을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로써 가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간단없이 그릇된 생각을 한다. 우리의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더욱 근본적인 오류를 낳는다. 그 오류는 성령님이 오순절 날에 능력으로 교회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우리의 믿음이다. 환언하자면, 우리는 성령님의 고유의 본질을 진리의 영으로 믿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능력으로 임하셨을 때에 그분은 또한 그리스도 자신의 영으로 임하신 것이다. 오직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살아 있는 증거가 되게 하신다. 즉 우리를 진리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새로 태어난 교회를 향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능력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은 진리의 영을 받으라는 말씀이었다.

 

올바른 존재냐, 진실한 존재냐

세상은 진리에 대한 고의적인 무관심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다. 우리 자신이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치유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죄에 대해서 매우 엄격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식과 간사함도 죄라는 것을 숙고하지 않는듯하다. 기독교 안에는 가식적인 분위기가 너무 충만하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억누르고 있으며, 담대한 얼굴로 어두움 가운데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신앙고백과 함께 하지 않으면서 습관적인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우리는 올바른 존재가 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진실한 존재가 되는 것에는 실패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아시고 큰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진실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러하기에 그분은 우리가 진실한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셨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마냥 기다리고만 계시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 시작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두려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의 건강이 이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정신이 이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이것을 의지한다. 왜냐하면 진실하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4 장

진리의 성령

명령된 진리, 약속된 진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실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들을 예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모든 계명은 언약이다. “사랑하라”는 모든 율법의 궁극적 요구이며 개요이다. 우리가 모든 율법의 무게를 완전히 느끼려고 할 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새 언약 안에서 소망과 생명의 소산을 얻게 해주는 약속으로 변했다. “사랑하라.” 무엇이 율법과 새 언약의 요구를 다르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율법의 요구를 살아 있는 소망으로 변하게 했단 말인가? 바울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일컬었다. 이 비밀은 수 세기 동안 감추어진 것이었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7).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나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나의 목적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다면 영광의 소망은 계속해서 비밀로 가려질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생애 동안 율법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이며, 그것을 수행하는 삶에 무척이나 만족했던 사람이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가장 엄중하고 가장 지조 있게 해석했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다(빌 3:5,6). 그러나 그 후에 그에게 한 일이 일어났다. 그는 말하기를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했다. 나는 계명이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계명을 수행하기 위해 예비된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렀다. 계명이 요구하던 것이 갑자기 드러났다. 나는 내가 계명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더욱 위대한 예비하심이 오기 전에는 소망이란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해야 하는 신령한 요구를 대면할 때의 상황이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엡 4:25).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이 다른 사람에게 두드러진 거짓말을 삼가는 것보다 좀더 심오한 의미가 실려 있다는 것을 결코 상상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계명이 이르자, 우리는 우리의 거짓됨이 얼마나 깊고 미묘한지 보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내면의 가장 깊은 존재 속에 파고들어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친 것을 경험했다. 진리는 의[誼]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다. 실제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진리 안에 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휘장이 찢어지고 계명의 전체 의미가 계시되어졌을 때에 신령한 약속의 새로운 깊이의 전체 의미가 계시되어진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4:16,17; 16:13). 이 얼마나 위대한 요구인가! 이 얼마나 위대한 약속인가! 이 얼마나 위대한 예비하심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하셨다. 우리 중에 몇 명이나 정말로 이 말씀을 믿고 있을까? 당신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살아 계시기를 바랐던 적이 없었는가? 그리고 제자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그분을 뵐 수도 있고 말씀 드릴 수도 있기를 바란 적이 없었는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지구상에 왕으로 남아 계셔서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매우 유익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분은 모든 신학적 질문에 객관적으로 대답해주실 수 있으셨다. 그분은 모든 논쟁을 취급해서 최종적으로 우리 자신과 교단이 얼마나 옳은지 입증하실 수도 있으셨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그러나 그분은 어느 누구의 해석이 옳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떠나신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분의 계명이 우리의 가정을 다스리기 전에, 그리고 그분의 뜻이 우리의 마음에 이해되기 전에는 그분이 떠나신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없을 것이다. 나는 진리가 본질적으로 교리와 신학으로 구성되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외면적인 그리스도께서 진리와 비진리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바이다. 의는 본질적으로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진리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예비하실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것은 정교하고 상세한 율법의 진술이며, 그것을 가지고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진리와 의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이 근본적으로 넓어지고 깊어질 때에야 비로소 나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것이 유익한 일이었다는 것을 동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6:7). 진리는 가장 내부적인 영역에 거하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속에 진리의 영께서 거하시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거룩함과 능력과 위로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하나의 예비하심에 집중된다. 그것은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보혜사, 그리고 성결과 능력의 영이 진리의 영이시라는 점에 주목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오순절 날에 임하신 성령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진리의 영이시다.

제시 펜-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보혜사’라는 이름은 그분(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묘사해 준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인 ‘진리의 영’은 그분의 본질적 성품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의 성품과 더불어 일하시게 된다.”(Jessie Penn-Lewis, The Spirit of Truth, Page 4, Overcomers Literature Trust, 3 Munster Rd., Parkstone, Pool, Dorset, England).

하나님의 신께서 위로와 권능과 모략과 권위를 주실 때에는 오직 진리의 영으로서 일을 하실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진리를 거부한다면 단지 우리가 진리만을 소유하지 않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성령님이 진리이심을 부인하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위로하시기 위해 오시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위로를 주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사랑을 가장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본질의 표현이다. 그분은 자신에게 대해서 진실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진리를 회피하는 중에 위로를 얻었다면, 그 위로의 본질과 근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해볼 것이다. 내가 고통과 고난 중에 받아야 할 위로는 매우 실제적이다. 그러나 진리를 향한 나의 필요는 항상 크다. 다른 사람이 망상과 거짓 속에 끊임 없이 거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나는 그러한 자비를 갈망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그분의 위로는 항상 진리와 더불어서 임한다. 진리는 위로가 자기 연민을 위한 자극제가 되지 못하도록 지켜준다. 진리는 영광 받기를 원하는 나의 교만과 욕망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능력의 사랑 혹은 위로의 사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다만 그는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간계 없는 투명함을 열망함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간계 없는 투명함을 열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투명함을 매우 갈망하며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투명함과 더불어서 우리가 벗어나기를 원하고, 거절하기를 원하는 것들이 오기 때문이다. 진리의 사랑과 진리이신 성령님을 받는 것은 과장된 표현, 악의 없는 거짓말, 감언, 혹은 내가 자라면서 나 자신을 높이거나 보호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서도 삶의 전망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일으켜 준다. 진리의 영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방황할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과 및 다른 사람들의 거짓된 이미지가 산산이 부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소망하던 바가 아니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안전하고 희생이 없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불가피하게, 진리의 사랑과 및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은 고난의 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멸과 의심과 겸양은 고난의 모든 유형들이기 때문이다. 고난이란 내가 필사적으로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슨 대가라도 치룰 것이다. 내가 진리를 두려워하는 이상으로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고난을 피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진리를 겁내기 때문이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7,8)

 

진리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쫓는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한통속이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진리 안에서 행하도록 부르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진리 안에서 믿음과 온전한 정신이 성장할 수 있으며, 진실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경험할 때에 일시적으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숨기시지 않는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해야 할 모든 이유를 주시듯 우리에게 진리를 사랑하고 신뢰해야 할 모든 이유를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주저하면서 살아 남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어두움과 거짓의 크기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하시는 성령님은 약화된 진리의 빛 안에서 나를 위로하실 수 없으시며,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나실 수 없다.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사상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의식하고 있든지 아니하든지 그들은 나를 두려워하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 어두움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한다.

나는 비겁한 자로 시작해서 결국 우상숭배자로 끝나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진리이고, 진리의 영이 그분의 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진리의 영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행하기를 거부한다면 과연 내가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충만한 임재로 인하여 모든 망상과 그림자가 걷히게 되는 날이 올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날에 그들은 많은 위대한 일들을 행하고 교리적으로 정확한 설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증거했다고 확언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오히려 “내가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너는 결코 나와 함께 거하지 않았노라. 너는 결코 나의 영을 사랑하지 않았노라. 너는 진리를 두려워했고, 진리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의 비겁함은 우리가 필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위로를 받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진리의 고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은 필적할 것이 없는 치유의 위로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2,13). 그분은 또한 위로자이시다. 그분만이 우리가 모든 진리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드실 수 있다. 진리의 영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로지 거짓된 위로를 받게 될 뿐이다. 거짓된 위로는 고난 주위에서 맴돌게 한다. 참된 위로는 고난을 통과하게 한다. 거짓된 위로는 결코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이것은 비진리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참된 위로가 진리 자체의 표현인 것과 같다. 거짓된 위로는 거짓된 다른 것들과 더불어서 우리를 농노의 신분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없다. 거짓된 위로는 사람들을 빛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지 않고 거짓의 아비에게로 이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다. 이러한 거절은 단 한가지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거절이란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절은 평생 동안 거짓과 반쪽 진리를 선택하도록 누적된 결과를 낸다. 이것은 진리보다 위로를 더욱 선호하게 만들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삶보다는 안전하고 고통 없는 삶을 더욱 선호하게 만든다. 성령님이 망상과 반쪽 진리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셔서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안일하고 편안한 삶이 유지되기를 더 선호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부분적인 지식에 우리 자신을 내어 놓고 있지는 않는가? 혹 우리는 하나님을 환영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어떠한 대가를 치루고서라도 그분을 따를 의향이 있는가? 우리가 날마다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되든지 아니면 진리를 두려워해서 도망하는 자가 되든지 하는 것이다.

 

 제 5 장

성품과 품행 안의 진리

낮은 요단강

산꼭대기로 초대 받는 것은 매우 인기가 있다. 그렇지만 요단으로 초대 받는 것은 좀처럼 인기가 없다. 만일 누군가가 진리의 영을 구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산꼭대기가 아닌 골짜기에서 찾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위임된 모든 일들을 완성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요한의 세례는 완전한 겸손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산꼭대기에서 엘리야와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요한은 골짜기에 선 ‘엘리야’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요한)이니라”(마 11:14)고 하셨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위해 주님이 예비하신 길을 보고자 하는 식지 않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면, 만일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당신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온다면, 만일 당신이 진리의 살아 있는 증거로써 이 시대의 빌라도들(Pilates) 앞에 서기를 갈망한다면, 당신에게 있어서 요한은 엘리야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님을 갈망하지 않는 자는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낮은 요단강이 성령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역을 시작하셨던 곳이 이토록 낮은 장소였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다른 장소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요한은 큰 군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다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몰려와서 그를 보았다. 몇몇 사람들은 단순히 요한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구경하러 오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은 단지 회개에 대한 신학교 연구논문 자료를 구하기 위해, 또는 다음 주일 설교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진리를 구하기 위해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든 거짓된 것들을 뒤로한 채 세례를 받기 위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러한 회개의 유는 진리와 진리의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에 대한 열매와 표적이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그리고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케 되지 않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요한의 사역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요단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요한을 보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에 나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심이 서기만 하면 그 결심은 필연적으로 당신으로 하여금 둑을 지나서 요단 강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진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인격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깨달을 때에 성령님이 우리 육체에 임하신다. 그리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외식과 위선에 대한 거룩한 증오가 필요하다. 진리를 갈망함과 모든 유형의 거짓된 것들을 미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비둘기는 오직 진리를 갈망하고 거짓이 없는 인격 위에 거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았는지를 보시고 분별하신다. 성령님은 이러한 인격을 지닌 겸손한 자 안에 충만히 임하셔서 그분의 속성과 은사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격과 본질인 진리를 나타내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앉으셨을 때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성부 하나님은 이 순간을 택하셔서 자신의 기쁨을 드러내셨다. 그분의 기쁨은 예수님이 무언가를 시행함으로 말미암아 표현된 것이 아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아직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의 사역은 시작도 안된 상태였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요한도 마찬가지임)은 그분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모습을 보시는 것이다. 성부는 성자의 인격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으신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일과 그분이 지니셨던 모든 권세는 그분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재현하거나, 심지어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분의 권세는 소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진리 안에서 행함으로 인하여 성부께서 받으시는 기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과 하나님의 음성을 예비하셨다. 그분은 또한 성자의 정체를 요한에게 계시하셨다. 세례 요한은 진리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혈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육체적으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요 1:31-34)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낯선 분이 아니셨다. 그들의 어머니들은 서로 사촌이었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육체의 눈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없었다. 요한이 예수님과 혈연이 있었어도 그 관계는 예수님의 존재를 아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뚜렷한 표적으로써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일으키시지 않았다. 기적적인 역사들은 나중에 되서야 그분의 인격을 확증해주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표적을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임하시고 그 위에 거하신 것으로써 보여주셨다. 요한은 성령님이 순간적으로만 예수님과 연합하신 것을 목격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성령님이 순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스쳐 지나간 것도 아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영구적으로 연합하시기 위해 임하셨으며, 그 연합은 본질과 성품의 일치이다. 요한은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단순히 어루만지시는 것만 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이 시대의 성도들이 성령님께서 교회를 이따금 감동하시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요한이 목격한 것은 성령님이 인간의 육체 위에 임하여 거하신 것이었다. 그는 성령님, 즉 진리의 영을 본 것이다. 그는 성령님이 사람의 인격에 남으시고 거하실 수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스도인들의행실을 관찰하는 회의론자들과 구도자들도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을 목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겸손과 회개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세례를 주러 왔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지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사건이 덜 본질적인 것일까? 우리는 “고집불통의 유대인들”이 이방세계와 더불어 구약이 말씀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의 진정한 의미를 궁극적으로 깨닫고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리 안에서 행하는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유의 표적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 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겸손과 회개의 물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 강가까지만 올 것이며,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물속으로 들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물속으로 들어가기만 기다릴 것이다. 이스라엘과 불신세상은 교회가 나타내지는 모습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허식과 오식을 벗어버리고 높은 곳에서 요단강의 낮은 곳으로 내려와 겸손과 회개의 세례에 순종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세상은 교회 위에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고 거하시는 것을 볼 것이며, 성부께서 교회에게 이르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마 3:17, 요삼 4)라고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필시 그들이 회개와 믿음의 물속으로 들어가도록 권유 될 것이다.

 

비둘기의 인내

비둘기가 지상에 거하는 것에 대한 성경 속의 사례는 예수님의 세례 시에 있었던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노아의 때에 이 지구는 물로 덮였었다. 비가 그쳤을 때에 노아는 방주로부터 두 마리의 새들을 풀어놓았다. 한 마리는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까마귀는 홍수의 물이 마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판 받은 옛 지구 위로 떠오른 사물들 위에 서 있는 것에 만족해 했다. 다른 새는 방주로 돌아왔다. 그 새는 까마귀와는 다르게 자신이 두 발로 서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특유한 종류의 새였다. 이것은 아무런 일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기의 흠 없는 성품을 지킬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새는 비둘기였다. 비둘기는 홍수의 물이 빠지고 새롭게 변화된 지구가 드러나자 자기가 거할 장소를 찾은 것이다.

그 비둘기는 필시 비범한 인내를 지니고 있었다. 그 비둘기는 오랜 기간 동안 방주에 머물러 있었기에 다시는 한정 되지 않은 장소에서 살고자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둘기는 옛 것에 둥지를 틀 수 있는 첫 기회를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던 성령님은 예수님의 강생을 얼마나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다리셨겠는가? 노아의 시대 이후로 비둘기의 성품이 변했을까? 성령님이 전보다 덜 인내하시는 분이 되셨을까? 혹은 그분이 전보다 덜 특별한 분이 되셨을까? 성령님이 옛 인류의 유해[遺骸]들 주위에서 선회하시다가 결국 지쳐서 그곳을 거처로 삼으시려고 했을까? 그분의 성품은 변하지 않았다. 비둘기는 분별이 없는 중에 선물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성령님은 자신이 거할 곳을 찾아오실 때에 매우 분별력 있게 행하신다. 그분은 그렇게 하시므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노아도 역시 큰 인내가 필요했다. 폭풍이 지나가고 태양이 다시 비추었다. 무려 일곱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갇혀 있은 후에 방주는 산꼭대기에 걸리게 되었다. 그런 후에도 노아는 여전히 기다렸다. 방주의 문을 친히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방주의 문을 여는 것은 노아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노아는 땅이 드러날 때를 알기 위해서 비둘기를 사용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노아는 마른 땅이 드러나기만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 선택이 더욱 어렵다. 우리는 구원 받았으며 세례 받았다. 무엇 때문에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더 긴 시간 동안 갇혀 있어야 하며 한정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기다린다

우리의 성급함은 우리 마음을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과제와 필요는 매우 크고 화급하다. 우리 개인의 삶과 가정과 교회는 해결책을 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즉 질서와 안정을 가져다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금전적으로 궁핍함을 느끼고 있다. 세상은 복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결혼생활의 회복이 필요한 가정들이 수다하다. 세상에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순전함으로 인해 감동 받아야 할 사람들이 넘쳐 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느 누가 기다릴 수 있겠는가? 조금 가장하거나 과대시하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일까? 과거에 잘 통하던 방법들과 책략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잘 통하는데,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도 나쁜 것일까?

진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거짓에 오염된 것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도록 한다. 이러한 내부적인 억제력이 없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감정을 속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교묘히 기만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비둘기가 아닌 다른 새가 우리 위에 머물기 위해서 날아올 것이다!

신약성경 가운데 한 책에는 사도들의 행전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흥미 있게도 사도행전은 완전히 수동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으며,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믿었지만 누가는 여전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기록했다.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고난의 한 형태이다. 사람이 위험과 빈궁으로 인해 둘러싸임을 당할 때에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3년 동안의 강한 훈련을 거치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40일 동안이나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난 후에 결국 기다리라는 분부를 받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서 그들이 해야 할 사역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하고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듣기 전에 위로부터 능력을 받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다(행 1:8).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지느냐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 훨씬 중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시던 기간은 노아가 방주 안에 있을 때에 비가 내렸던 기간과 동일하다.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천국에 대한 말씀을 듣는 것은 천국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및 우리의 증거가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그런 종류의 가르침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기다리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들 것이다. 우리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기다려야 한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예수님은 40일 동안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만일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 몇 마디라도 기록했더라면 오래 전부터 성도들이 우리에게 물어오는 몇몇 당혹스러운 질문들을 대답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마치셨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대답하셨던 기록만을 남겼을 뿐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우리는 간단하게 우리 자신을 제자들의 위치에 둘 수 있다.

“주님, 휴거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대환란은 정확하게 언제 일어나게 되나요?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때’는 정확히 언제를 의미하는 것인가요? 지금이 마지막 때인가요?”

우리 모두는 이것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한다. 그것들을 알고자 하는 질문들은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대답이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7,8). 지식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능력을 받는 것은 천국에 대해서 “방법” 혹은 “때”에 의지하지 않는다. 나는 먼저 모든 진리를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진실한 존재는 되어야만 한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든 대답이다. 특히 당신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예수님이 그렇게 대답하신 것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우리의 지식, 특히 종말에 대한 지식과 천국에 대한 지식이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우리가 종말사건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들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실 도구들이 되게 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 절름발이가 되게 하는 자기 의식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이것은 영적 교만의 독을 해독해주는 신령한 해독제이다. 종말에 대한 지식과 장차 도래할 천국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덜 진실되게 만든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말을 과장되고 내용이 없고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소멸할 수도 있다.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하신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제자마저도 이 말씀에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성령강림은 우리가 아는 지식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다. 성령강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예비 되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으로 내려가셨던 길처럼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다락방으로 올라갔던 길은 낮아지는 길이었다. 그 길은 결코 높아지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열흘 동안 예루살렘에 남아서 기다려야 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낮은 곳으로 인도되어 완전히 겸손해졌다.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몇 주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경험을 여전히 상기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는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흩어졌다. 그들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에 진리의 영과 예수님의 심오한 자기계시를 충만히 받을 준비가 되었다. 만일 제자들이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로 행하는 경험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더라면 성령강림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아닌 성령강림을 증거하는 “오순절파”가 되게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을 건너갈 때마다 변화가 일어났던 것에 대한 기사들이 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갔으며, 홍해를 지나므로 출애굽 할 수 있었다. 출애굽은 매우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매우 급히 떠나는 바람에 떡을 부풀게 하는 누룩을 가지고 나올 겨를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마치 과도기와 같다. 이것은 물을 지나서 옛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누룩은 진리를 거짓이 되게 한다

우리는 구원과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을 자랑하기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고찰해보아야 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6-8)

 

우리가 명절에 먹는 떡과 및 교제와 섬김과 예배의 떡이 여전히 외식과 거짓된 사랑과 비진실의 누룩을 포함하고 있다면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누룩의 양에 달려있지 않다. 누룩이 떡에 들어있는지 아닌지 가 문제이다.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데에는 매우 적은 누룩이 필요할 뿐이다. 적은 외식과 가식이 우리의 교제와 예배의 떡을 전부 거짓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묵은 누룩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시간과 의향이 있었다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갑작스럽고 완전할 수 있었겠는가? 바울은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전에 모든 누룩을 내어 버려야 했다. 이 명절에는 유교병을 먹을 수 없었다. 오로지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만 지켜야 했다. 우리는 명절을 바르게 지키는 채 할 수는 있지만 순전함과 진실함이 없이는 우리가 받은 구원과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진정한 마음으로 찬양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외식과 비진실의 누룩

물을 지나가는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의 떡이 외식과 비진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라면 천상의 비둘기가 우리와 함께 거하는지에 대해서 진진하게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영적 은사들과 종교활동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 아니고, 반면에 누룩처럼 변해버렸다는 성령님을 얼마나 슬프게 만들겠는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이다! 거짓들은 격리될 수 없다. 형제를 향한 거짓된 사랑은 하나님에게 거짓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비둘기(성령님)는 거짓이 만연한 곳에서 거하실 수 없으시다. 그 비둘기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천상의 비둘기를 모방하고 가장하므로 성령님을 몰아내고 누룩을 퍼뜨리게 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의 모습을 유지할 길을 찾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명예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실패와 수치를 드러내는 표이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을 속이고 있지는 않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숙고해보면 우리 자신마저도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는 것의 대가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는 것에는 고통이 따르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뒤로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관계 속의 진정한 평화를 대신해주는 임시 휴전을 버리는 것과 순전한 권세의 자리를 대신했던 허세와 속임수를 버리는 일을 포함한다.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진리를 대신하는 것들이 작용되어진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용하기는 하지만 진실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쓸데 없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대안은 우리로 하여금 비진실한 존재들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진실과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작용되어진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괴적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작용되어졌던 습관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 배우자들과 자녀들과 교인들과 및 우리 자신들을 대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누룩이 우리 인생 속에 성공리에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의 세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우리 삶의 외관에 있는 모든 것과 단순한 모습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물로 세례를 받을 때에 고난을 당하게 된다. 말뿐인 삶에서 진실한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 세례이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물에서 나올 때에 성부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이 임하여 거하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

 

충만에서 능력으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가 시험 당하기에는 가장 적절치 않은 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성령님이 예수님의 생애에 시기 적절하고 강력한 시험을 가져다주신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충만함을 받고서 광야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성경은 또한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로 유인한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서 임하셨던 성령님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한다(마 4:1).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에 대한 첫 결과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에서 나오신 후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셔서 홀로 있게 하시므로 사십일 간의 금식을 통해 육체의 기력을 모두 소진하게 만드시고 주리게 하셨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성령님 자신이 시험을 끌어들이는 요인을 제공하는 분이신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다. 성령님이 사람 속에 한량없이 거하시는 것이 궁극적 시험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확신하고 계시는 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것을 확신하고 있는가? 나는 진리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가? 나는 편의를 주는 환경의 도움을 받지 않고, 육체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장 교묘한 거짓들을 폭로하고 물리칠 수 있는 확신이 있는가? 특히 내가 위로와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시험이 다가온다 해도 물리칠 확신이 있냐는 말이다. 어떤 종류의 진리와 어떤 종류의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극한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확신과 영적 스태미나를 공급해줄 수 있겠는가? 단순히 말뿐인 진리는 나로 하여금 이러한 고난을 견디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나를 광야에서 시험을 견디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갈릴리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할 것이다.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광야로 이끌림을 받으셨다(눅 4:1). 그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서 광야에서 나와 갈릴리로 가셨다(눅4:14). 만일 우리가 시험 당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이 없다면 시험을 받은 후에 능력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육적, 영적 필요와 원함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거짓에 의지하게 하는 유혹을 가져다준다. 시험은 우리가 홀로 외딴 곳에 머물러 있을 때와 힘없고 지쳐 있을 때에 더욱 자주 찾아온다. 만일 시험이 우리 속에서 교만과 외식과 타협으로 찾아온다면 우리는 갈릴리에 들어갈 때에 진정한 권능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요단강에서 나온 후에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므로 성부의 기쁨에 대한 평온하고 확고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면 시험은 우리 속에서 촉매처럼 작용할 것이다. 이 시험은 성령충만을 능력으로 바꿀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모든 거짓된 능력의 근원이 제거되고 거부되므로 우리 속에서 실제가 되어진다.

 

진리 테스트: 우리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4,16)

 

나사렛은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은 후에 가야 할 장소이다. 갈릴리와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곳”이기 때문에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는 장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으신 후에 즉시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로 가셨다. 가장 큰 시험은 항상 우리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서 온다. 그들은 우리의 연약함과 결점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날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사기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보면서 “이 사람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묻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속이기란 쉬운 일이다. 우리 각자의 나사렛, 즉 우리 자신의 가족과 교회와 사업장에서 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6-18).

 

허세냐, 실체냐

오늘 우리가 천상으로부터 임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함과 권능을 받지 않은 상태로 우리의 나사렛(고향)으로 가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선포한다면 그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눅 4:20).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그들도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증거하는 것들의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제외한 채 말씀을 전한다면 우리 자신을 주목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세상 사람들은 말씀을 너무 많이 들으면서 자랐으며,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거부한다.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셨을 때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분에게 고정되었다.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수정하려 하거나 전략적으로 철회하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허세를 부리는 줄 생각했기에 그분의 실체를 시험하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하셨다. 오늘날의 나사렛들에 사는 마음이 상한자들과 포로된 자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다시 듣고 싶어한다. 그들은 태도를 바꾼 후에 교회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고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경멸적인 말이 아닌 놀라움의 표현으로써 다음의 말들을 해야 한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더냐? 이 사람들이 우리처럼 모순되고, 진부한 것들로 가득하고, 탐욕과 두려움의 포로된 자들이 아니더냐?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들 속에 이토록 강렬한 사랑과 투명함과 단일성과 뚜렷함과 진실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들었던 말들을 교회가 들을 날이 도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32).

그 날은 반드시 도래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안전하고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녹아질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1929년에 경제공황이 닥쳐왔을 때에 사람들이 창문에서 투신했다면, 그 시대보다 훨씬 빈약하고 제멋대로인 이 세대의 사람들이 세계 경제기구가 비트적거리다가 붕괴될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진동하게 될 것이다. 망상과 반쪽 진리와 교만과 탐욕과 두려움 위에 기초를 둔 모든 것들은 마침내 진실과 충돌할 것이다. 그 때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학대 받을 것이며 마음이 상하게 될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히게 되고 소경이 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때가 왔을 때에 사람들이 유일하게 달라붙을 수 있는 곳이 교회일까? 아니면 교회마저도 세상처럼 거짓과 망상에 의해 황폐하고 산란해질 것인가?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글을 끝까지 읽지 않으시고 중도에서 멈추셨다. 그분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으로 결론지으셨다. 원래 이 구절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the day of vengeance)을 전파하여”(사 61:2)라는 말씀으로 끝맺어졌다. 우리는 이 구절을 성취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세상사람들은 거리 귀퉁이에 서서 최후심판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들을 늘 보며 살아가고 있다. “회개하라. 지구의 종말의 다가왔다!” 교회가 세상의 종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장차 도래할 심판을 선포하는 자들은 바보들로 취급 받게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날의 이른 새벽의 빛을 볼 수 없는 소경들이다. 이 빛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며 거짓된 것임을 조명해주고 밝혀주고 있다. 거짓이 거짓임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시력에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다. 거짓이 정확하게 거짓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 진리인양 믿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으로부터 엄청난 안전과 위안과 능력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거짓의 기만적인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짓이 거짓임을 분별하는 능력은 마지막 때에 있을 심판교리를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거짓이 거짓임을 아는 능력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오며, 거짓이 주는 위안과 안전과 능력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또는 경험을 통해서 온 세상이 거짓의 자식들이 되었음을 보고 있는가? 우리가 만일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정확한 종말론을 알고 있다 해도 불신자들과 같은 소경이다. 만일 소경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과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자들의 눈이 멀었다면 결국 그들과 함께 개골창에 빠지게 될 뿐이다.

 

심판: 교회 먼저

심판이 교회에 먼저 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단지 최후심판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빛이 교회 속에 있는 거짓과 망상을 비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비진실한 모든 것들을 찾아내야 하며, 모든 것을 진리의 빛을 통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를 진리의 빛을 통해 보시는 것처럼 교회도 그 자체를 진리의 빛을 통해 보아야 한다. 진리의 빛은 진실하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한 심판이다. 교회는 심판의 날의 빛 안에서 살고 있으며, 심지어 그 빛을 세상 가운데에서 발산하고 있다. 오직 곧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만이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치유와 눈먼 자들에게 회복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진리의 빛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교리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변화시킨다. 진리의 빛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근원이다. 이사야는 이미 위대한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시야 왕이 사망했던 해에 자신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영광 중에 계시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사야가 본 환상은 연구논문이나 흥미 있는 설교 시리즈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사야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땅에 엎드러져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울부짖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울부짖었다(사 6:5).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보았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실제로 보듯 했으며, 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되서야 그는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셨던 말씀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가서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소망의 말씀이요, 치유의 말씀이다. 이는 이사야 자신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치유 받았고 회복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정결케 되고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백성들을 행하여 심판과 진노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다.

우리의 입술이 여전히 반쪽 진리와 부정직의 얼룩으로 부정한 상태에서 이사야가 수행했던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임명하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소유하셨던 능력보다 낮은 것을 가지고 그분이 하셨던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곧 도래할 심판의 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날의 빛 가운데에서 행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입 밖에 꺼내는 말은 진리를 모방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망과 목적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장래에 어떻게 될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요일 3:2,3). 하지만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며 목적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그분처럼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망상과 두려움과 소욕으로 인한 희미한 주님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신 그대로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이 언제 어느 때에 오셔서 우리가 그분처럼 되어질지 알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오신 때에 우리의 망상과 두려움과 열정으로 인한 구름에 쌓인 희미한 주님을 보게 되지 않고 그분의 계신 그대로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라면 그분이 정결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정결케 하실 것이다. 이러한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는 그 자체를 정결케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진리를 말할 것이며, 서로의 눈먼 것을 회복케 할 것이며, 서로를 진실되게 할 것이다.

남을 항상 사랑한다는 것은 종종 고통을 동반한다. 진리의 사랑은 때로 극한 행위들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레위인들을 구별하셨던 날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와서 온 이스라엘이 방자히 행하는 것과 우상숭배하는 것을 발견했던 날이었다. 모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6)고 말했다. 적은 무리의 남은 자들이 모세에게 나아왔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일어서서 춤을 추든지 아니면 여호와를 따르든지 양단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들은 거짓의 위안을 마음껏 누리든지 아니면 자신들을 진리에게 위탁하든지 해야 했다. 모세에게 나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모세는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출 32:27)고 말했다.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가 진리를 사랑함으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진 저 문까지 다니면서 진실되지 못한 자들은 가족이든 배우자이든 성도들이든 자기 자신이든 다 도륙할 수 있겠는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4:25, 5:8,9)

 

삶의 진실함은 모든 거짓과 진실하지 못한 모양을 버린 것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삶의 진실함은 모든 열매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함은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 맺어지는 열매이다. 성령님의 본질은 진리이다.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은 아직도 동일하다. 나무는 항상 그 열매에 의해 구별되어진다. 만일 진리의 성령님이 나무의 수액과 생명이라면 그 나무의 열매는 생명의 진실함이 될 것이다.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 사랑과 믿음과 친절과 겸손 같은 성령의 다른 열매들을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삶의 진실함이 없는 곳에는 사랑과 믿음과 친절과 겸손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삶에 첩경은 없다. 삶의 진실함으로 가는 길은 세기가 지나가면서 넓어진 것이 아니다. 지식의 축적이나 경험의 축적이나 선행의 축적이 다른 길을 내주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진리와 생명이다. 그 길은 몹시 좁은 길이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라고 명하시는 유일한 길이다. 길을 넓히는 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영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소망을 주시는 것만이 가능하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으시다.

 제 6 장

절대 진리와 거짓의 영

일시 정지

자동차를 운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교차로에 진입할 때에 천천히 서행하다가 양방향을 훑어보고 정지해야 할지 아니면 천천히 지나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표지판은 “일시정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안내 혹은 경고일 뿐이지 진정으로 “일시정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자동차를 운전하는 중에 멈춘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일시정지는 시간과 기름과 브레이크 라이닝의 소모를 요구하며, 차량의 움직이는 힘을 거스린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필요와 주관성에 따라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비록 진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결코 그런 의미는 아니야.” 그렇게 하고 난 후에 우리는 성령님이 왜 우리 삶 가운데에 함께하시지 않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가 결점이 있다. 우리는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

일시정지 표지와 같은 진리가 우리 자신에게 편리하고 관심을 둘만한 것일 때에 우리는 이것을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교차로에 차량이 지나갈 때, 혹은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을 때에 완전히 멈춰 서려고 한다. 그러나 멈춰 서는 것이 전혀 유익이 없어 보일 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에덴 동산에 있던 하와처럼 금단의 열매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한 열매인지 알아보고자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먹지 말라 하셨지만, 그분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그게 아니야. ‘일시정지’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막무가내로 교통표지판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표지판에 따라서 자신과 남의 안전을 위해 순종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서행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상의 순종일 뿐이다. 이 논쟁은 이미 결론지어졌다. 진리가 결론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되면 서론과 본론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은 그렇게 마무리 되어진다. 진리가 우리의 결론에서 상대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종일뿐이다. 오직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고 순종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세속적 지혜의 중심에 있다. 세상은 관용을 기본 덕목으로 취급하며, 절대 가치와 절대 진리 외에 모든 것을 방관한다. 세상의 지혜와 계몽에게 있어서 “독단론”보다 더 모욕적인 말은 없다. 세상은 모든 절대적인 것들을 거부한다. 세상은 “독단론”을 거스리기 위해서 정의보다 관용을 높이고 진리의 권위를 땅에 떨어지게 한다.

 

독선이냐, 순종이냐

상대주의는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너에게는 그것이 진리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 “네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는 거야.” “검고 흰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와 같이,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간통이 아름다운 행위로 보일 수 있으며, 남색[男色]은 “선택적인 삶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가치와 판단은 회색 안개처럼 변했다. 회색은 진리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다. 이것은 상대주의, 의와 악, 흑과 백, 그리고 빛과 어두움을 혼합해서 나온 결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분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시다. 빛은 진리이다. 회색은 속임수이고 거짓은 어두움이다. 하나님께서 혼돈 된 세상을 향하여 발언하신 첫 말씀은 “빛이 있으라”였다. 그분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창 1:3,4). 나누는 역사는 결코 효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빛과 어두움은 혼합될 수 없다. 또한 진리와 거짓도 혼합 될 수 없다. “일시정지”가 불편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히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지혜는 항상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고귀함을 제거하려 하고, 진리와 거짓의 경계선을 흐리게 하려 하고, 우리가 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상대주의는 진리와는 다르게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이는 상대주의를 따르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 측연선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측연선[測鉛線]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측연선은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의와 절대적 사랑이다. 이 측연선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다. 그분 안에 거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가 분리되어지며, 혼돈하고 공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주는 대강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대강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대강 진리와 길과 생명이 아니시다. 그렇기 때문에 구세주께서 그리 인기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시며 진실하시며 심히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분이시다. 그분이 “멈춰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은 “천천히 통과하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요 1:17). 이 시대의 사조는 그리스도와 진리에 완전히 대조된다. 시대사조는 희미한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희미함(회색 빛)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태초부터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거짓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말했다. 이 악한 시대는 결말이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원리에 의해 태어났다. 이 시대는 그 원리를 기본 강령으로 생각한다.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간통을 정당화하고, 임신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낙태를 정당화하고, 대량 학살을 위해서 인종우월주의를 정당화한다. 세상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면서 그것의 영적 본질을 수행하려고 한다. 회색은 세상이 좋아하는 분위기이다. 세상은 살기 위해서 회색 속에서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교회는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태어났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회색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교회뿐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의인들은 빛을 사랑하는 자들이다(요 3:19-21). 빛은 수시로 변화하는 모든 회색 그늘들을 사라지게 한다. 이것은 모든 사물들을 밝혀준다. 의인들은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 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결코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이나 예배생활이나 얼굴에서도 그늘진 곳을 찾아 볼 수 없다.

 

천국의 진리냐, 세상적 지혜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색 진리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빛을 단지 지식적으로 알고 고백하면서 그 가운데로 행하지 않으면 상대주의와 자만의 어두운 그림자를 쫓아낼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단지 우리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과 편리하다고 느끼는 영역까지만 하게 된다. 진리가 우리의 삶과 사역의 실제적 논점이 될 때에 우리는 세상과 같이 상대론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우리의 지식은 천상의 것이지만, 우리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이다. 우리는 교통표지판이 “일시정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떤 도로에서 혹은 어떤 장소에서는 속도를 늦추다가 결국 멈추지 않고 지나갈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지나갈 때마다 진리의 영의 영역을 지나쳐서 거짓의 영의 영토와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만일 진리가 편리한 것이었다면 온 세상이 진리를 좇았을 것이다. 명확히 말하자면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을 수 없다. 진리는 곤혹케 하는 것이요, 장애물이요, 몹시 불편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진리의 영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진리를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두지 않는다. 세상에는 세속적 정신과 지혜로 가득 차 있다. 판매와 광고와 필요 경비를 진리와 성령과 말씀에 입각하여 결정하면 얼마나 많은 사업체들이 순간적인 붕괴와 부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겠는가? 세상의 지혜에 따르면 세금을 전부 납부하는 사람, 혹은 물건을 산 후에 자신이 받아야 할 거스름돈보다 더 많이 받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머지 돈을 돌려주는 사람, 혹은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몸을 던져 노동하는 사람을 일컬어 바보라고 부른다. 세상 속에서는 이러한 유의 정직함은 바보 같은 짓 이상의 것이다. 정직함은 세상에게 있어서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이다! 정직함은 세상을 위협하는 것이며, 세상의 모든 구조를 거스리는 것이다. 만일 세상을 받치고 있는 반쪽 진리와 과장과 속임수가 갑자기 빠져나가게 되면 세상은 요동하다가 쓰러질 것이다.

교회들과 선교회들이 진리 하나 위에만 기초를 두고자 결심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만일 당신이 잠시 동안이나마 성령님께 대한 순종의 기준을 버리고 세속의 지혜를 좇는다면 천국과 세상 사이에 구획을 긋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역”을 위해서 당신의 필요를 과대시하고 과장되게 말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빤한 거짓과 죄악을 정당화함으로 결말을 맺게 될 것이다. 당신이 정지신호를 한번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모든 정지신호들을 무시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진리: 순간순간 불침번

교회를 포함한 온 세상이 진동할 때가 도래할 것이다. 오로지 진리의 반석 위에 기초를 둔 것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을 것이다. 자기를 정당화하는 세상의 지혜로 인하여 거짓된 모든 것들과 교묘한 모든 것들과 부패한 모든 것들은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이르면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끝은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진리를 진실되게 증거하고 예찬하기를 바라는 것은 거짓과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을 배제한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역이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진리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지혜와 거짓의 영을 사용한다면 종국에는 우리의 명성과 영광을 남길 뿐이다. 가장 깊은 내면 속의 진리는 몹시 엄격하게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경계할 것을 요구한다. 겉보기에 모든 작은 타협은 거룩한 비둘기가 떠날 때까지 우리를 진리의 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거룩한 비둘기는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그분이 우리를 떠나셨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북 미네소타에 영하로 내려가는 겨울이 다가올 때에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거할 장소를 마련할 수 없다면 당신의 절박한 필요를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당신은 후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설명과 제안과 핑계를 선교편지에 기록하겠는가? 당신이 필요한 것이 적법한 것일지라도 거짓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만일 진리의 빛 안에서 발언 되어지지 않을 바에는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신이 속임수를 쓰지 않고도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이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은 항상 진리의 행위이다. 진리에 대한 논의는 믿음에 대한 논의이다. 우리가 진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그 어느 것에도 감동을 받지 못할 것이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 자신이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가 얼마나 죽어지는가에 의해 헤아려진다.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우리는 그분의 정의를 통해서 참 교회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분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다. 이 정의는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은 나다나엘을 볼 때에 여전히 즐거워 하신다. 나다나엘은 아직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알아보셨을 때에 그는 교리적 진리 혹은 사실적으로 옳은 진술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간사함이 없는 인격으로 인해 참 이스라엘이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 받은 것이다. 나다나엘은 진리 안에서 행했다. 그는 외식과 속임과 거짓된 모습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빛 안에서 행하고 살았으며, 그 빛을 세상에 비추었다.

제 7 장

진리: 정직한 영

바울: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바울은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바울에게는 간사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어느 누구도 바울이 말에 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지혜 있는 말을 하였지만, 그의 말은 이 시대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한 말씀들은 영적이었으며, 영적인 생각들에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가 말을 유창하게 했을 때에 그의 말은 투명했다. 그의 달변은 온전히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말 잘하는 능력은 그 자체에 주의를 끌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명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헬라의 수사학을 배워 알고 있던 자였다. 그는 매우 유창한 어구를 사용해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웅변술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말을 할 때에 억양과 제스처를 사용해서 말의 효과를 한층 높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했다. 바울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당신이 만일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당신이 만일 진리를 증거하고자 한다면 진리의 영 자신처럼 겸손하고 진실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진리를 말함

바울이 말했던 모든 말씀은 진리로 인해 증거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말하지 않았다. 일단 진리의 본질을 깨닫기만 하면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과 유형과 내용은 말하는 사람의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거나 전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바울은 자신을 증거하는 것과 자신의 영광과 명예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울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었다. 이것은 자기 섬김과 명성을 얻고자 하는 관심과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의 죽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말을 할 때마다 바울이 직면했던 것들과 부딪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거나 방어하려 하든지, 아니면 진리만을 나타내기 위해서 진리를 신뢰하든지 결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더 화려한 말을 하려고 하지는 않고 있는가?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기보다는 말의 실수로 인해 낭패를 당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 바울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전파했다. 우리가 현대의 헬라 웅변술과 수사학적 미사여구를 버리지 않는다면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빠진 말 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얼마나 미련한 자처럼 보였을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울이 말씀을 전했던 헬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화술에 능한 자들이었다. 헬라인들은 세상의 지혜를 집약적으로 나타낸 자들이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비추어진 바울의 미련함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나타나셨을 때의 모습과 비교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나타나셨을 때에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으셨다. 그분에게는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것과 풍채가 없으셨다. 그분의 외모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것이 없으셨다(사 53:2,3). 세상의 지혜를 통해서 그분을 꾸밀 수 없었다. 그분은 꾸밈이 없는 진리이시다. 그러했기에 그분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기 보다는 싫어버린 바 되었고 외면 당하셨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님을 미련한 자요,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그분은 거절 당하셨고 비웃음거리가 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누룩 없는 떡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가 섬겼던 주님이 받으셨던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는 바울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며, 간사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리 안에서의 확신이냐, 인간적 능력이냐

바울은 자신을 강하고 인상적이고 확고한 웅변가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근원을 차단시켰다. 그는 두려움과 연약함과 떨림으로 세속적 지혜가 충만한 세상 가운데 나아갔다. 바울은 진리의 능력을 믿는 지고한 확신이 있었기에 다른 방법을 의지하거나 구하지 않고 진리만을 신뢰할 수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라면 기꺼이 조롱과 거절을 당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약함과 떨림은 회중 앞에 서는 모든 목회자와 모든 전도자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필연적 조건이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일을 인내로써 감당했다. 그의 인내로 인하여 우리는 진리에 의해 감동을 받고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교만과 불확신의 산물로써의 숙련된 테크닉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파했을 때에 직면했던 상황은 우리가 매일 아침에 일어나 거울 앞에 서는 일과 같은 것이다. 혹 나에게 간사함이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왜 나는 나 자신이 하는 일을 남들 앞에서 화려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바울은 오로지 투명한 말들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진리의 빛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도록 했으며, 자신에게 반사되어 돌아오지 않도록 했다. 바울은 진리를 말했다. 그는 항상 진리만을 말한 것이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액세서리와 헤어스타일과 향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들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가?

베드로는 여자들에게 권고의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마찬가지로 바울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딤전2:9,10)

 

베드로와 바울은 이 구절들에서 누더기와 넝마를 걸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좋지 않은 어법과 형편없는 논리를 가지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동기와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과연 나는 거울 앞과 강단에 설 때에 주저하지는 않는가? 나는 진리의 영의 영광을 나에게 돌리지는 않는가?

 

결말은 방법을 결정한다

나는 내가 증거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가? 나는 진리에 몰두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말하는 방법과 옷 입는 방법과 나 자신을 인상적이게 보이기 위한 방법과 진실되지 못한 이미지를 허용하지 않고서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가?

나는 간혹 나의 이미지를 바꾸고자 하는 유혹과 진리에 망상을 첨가하려고 하는 유혹을 받고 있다.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 나 자신을 높이는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유혹도 받는다. 그러나 거짓은 결코 진리의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옳지 못한 모든 이미지는 거짓이다. 자만과 교만과 불신의 동기로 인해 행해진 모든 것들은 거짓이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혹 나는 계속해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거짓된 이미지를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혹 나는 외부적인 것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행하게 하시고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인격을 지니고 있지는 않는가? 결말은 결코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다. 결말은 방법을 결정지을 뿐이다. 만약 결말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계시라면 그 방법은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리이어야만 한다.

 

당신은 표지를 보고 그 책을 말할 수 있다

세상은 “표지를 보고 그 책을 말할 수 없다”라고 하는 거짓된 지혜의 원리에 매우 순응되어져 있다. 그러나 당신은 나다나엘의 겉모습을 보고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으며, 성자 안에서 성부를 볼 수 있다. 진리의 영이 임재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에 모든 것을 밝히 보여주실 것이다. 진리의 영은 설교자의 말과 그의 헤어스타일까지라도 사용하셔서 그분 자신을 드러내신다. 실제로 당신은 책의 표지를 보고 그 책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것은 단순히 표면적이지 않다. 표면으로부터 내부로 스며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장 깊은 내면의 것을 표현한다. 만일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 영광을 얻고자 하는 허영심이 있거나 혹은 두려움이 있다면 표면적으로도 그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속에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라. 그러나 숨겨진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요 7:16-18)

 

나는 진리의 말씀들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서 진리를 사용한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광을 얻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하지만 영광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자만으로부터 왔든 또는 불신으로부터 왔든 그것은 우리를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의 기도와 나의 옷 입는 스타일, 또는 나의 얼굴 표정은 어떠한가? 나는 인정과 능력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혹 나의 몸과 메이크업과 말과 기도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마음과 그들을 컨트롤 하려는 시도는 없는가? 만일 우리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이러한 질문들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직 그분이 누군가를 일컬어 “그는 진리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하셔야 한다.

 

거짓의 교묘함

속이는 자와 속임 당하는 자 사이에는 거짓이 계속 진행되도록 허용하는 무언의 계약이 있다. 설교자가 배우가 되는 것은 회중이 관객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양자 모두에게는 자기를 섬기려는 마음이 있다. 아첨꾼과 아첨의 말을 듣는 사람, 그리고 꼬드기는 사람과 꼬드김을 받는 사람은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동일하게 자기 만족을 누리기 위한 이유들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관객”으로 취급 받을 때에 우리 영혼은 움츠러들게 된다. 관객은 무대 위에 선 사람의 연기를 즐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매우 잘 연기하고 나서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부터 사례금을 받는다. 그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기도하는 동안 목소리의 높낮이를 잘 조절한다. 그의 거동과 태도는 성도들이 생각하는 설교자상을 매우 훌륭하게 보여준다. 그가 증거하는 말들은 정확하며 감동적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영은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들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단지 제가 맡은 역할을 감당할 뿐이고, 또한 당신들도 당신들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쇼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는 자진한 한통속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허세를 들통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허세를 들통나게 하지 않는다. 진리는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채우기 위한 상대적인 것으로 변했다. 이것은 마치 불신자들이 진리를 대하는 것과 같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억압되어 있는 한 우리는 거짓의 미묘함으로 인해 미혹된 세상 속에서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망상을 용인하는 한통속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성결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서로를 성결한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중에 맹점이 없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위선자가 되기 쉬운 존재들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망상 속에 갇힌 존재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무언의 사랑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의 영혼들을 먹어치우는 거짓의 영을 감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영혼들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라고 강요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침묵하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전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열심은 우리를 삼키지 않는다. 우리를 삼키는 것은 거짓의 영이다.

 

진리의 영은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과 미련함을 고린도인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던 거짓 형제들이 할례에 대한 논쟁을 들고 일어났을 때에 갈라디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5). 그는 일시라도 누룩이 덩어리 전체에 퍼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가 안디옥에 있을 때에 외식하는 것을 보고 방관했다면 자신에게 더 편안했을 것이다. 바울은 어찌하여 교회의 기둥이었던 사도 베드로를 책망했을까? 특히 그는 예수님의 12 사도들 중에 들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책망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무례하고 아니꼬운 사람으로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바울은 어찌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구원한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일까? 어떤 사람도 자신이 광신자나 율법주의자나 사랑이 없는 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진리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안에 계신 진리의 영께서 타협을 허용하시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신중함과 소심함 사이의 상이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의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과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랑의 마음으로 외식하는 형제를 책망한 것이다.

 

온유함과 담대함: 하나의 근원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복음을 늦게 받아들였던 신참자였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다. 그는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세 제자들 중에 하나였다. 고린도인들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섰던 바울이 이제는 베드로를 책망하는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갈 2:11-14). 바울을 약하고 미련하게 보이도록 했던 분이 이제는 그로 하여금 베드로 앞에서 담대히 대면할 수 있도록 감동하신 것이다. 그의 약함과 담대함, 그리고 온유함과 견고함은 하나의 근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복음의 순수함과 진리를 사랑하는 열정이었다.

바울은 이방인과 함께 먹지 않는 유대의 규례를 여전히 지켜오던 유대인 성도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도착하는 순간 베드로의 태도는 변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갈 2:12)

 

베드로의 행동의 변화는 복종이나 사랑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온 것이다. 바울은 큰 은사를 받았던 베드로가 외식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모든 거짓은 자기 섬김의 목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창 12:13)고 하는 거짓말을 하도록 부탁했다. “나”의 생명을 애지중지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동안에는 유혹과 거짓의 능력으로부터 자유케 될 수 없게 된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삶…

심지어 베드로마저 이러한 유혹에 빠졌다. 그러나 만일 우리 자신이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미련한 상상이다. 베드로가 바울의 도전을 받았는데, 우리가 스스로 진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련한 상상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신이 외식의 덫에 걸려 있으면서 당신을 대면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바울이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만일 그가 사람들의 찬동과 칭찬에 빠져있었다면 베드로를 책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거절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조롱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든다. 오직 바울과 같은 사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자만이 두려움을 이기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베드로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였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십자가 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자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다. 그리고 필요 시에는 우리 세대의 베드로와 같은 자들을 대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3,14)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된다. 베드로의 외식은 전염성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신속히 퍼졌을 것이다. 행동은 말보다 더욱 크게 말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거짓을 방관하는 것에 대한 대가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점점 증가하여 결국 모든 대가를 다 받을 때까지 증가하게 된다. 지금 받아야 할 고통을 피하면 나중에 가중되어서 찾아 온다. 진리는 편안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안락과 편리를 택하는 것을 좋아하는 한 진리 안에서 행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의 영은 편안함과 자기 욕망과 자기 정당화를 찾고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예비한다. 거짓의 영은 우리가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확신 시키려 하고, 고통은 피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할 것이다.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것은 항상 값을 지불해야 한다. 진실된 길을 택하기 위해서는 거짓된 길을 버려야 한다. 진리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진리의 길은 생명을 걸고 형제를 사랑 안에서 책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책망할 수 있게 한다.

 

진리 안에서 행함: 십자가를 택하는 것

우리는 십자가를 목에 걸거나 자동차 계기판에 부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를 헌신적으로 좇아가는 삶은 반드시 십자가를 무해한 장식물로서가 아닌 매우 실제적인 매일의 경험이 되도록 할 것이다. 거짓의 영을 제거하는 것은 고통이 따르게 된다. 모든 타협과 모든 과장과 모든 거짓은 본질적으로 체면 손상과 죽음을 피해가는 것이다. 뱀이 에덴 동산에서 했던 첫 거짓말처럼 모든 거짓은 야망과 자만심과 자기 욕망과 교만을 드러낸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거짓의 영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거짓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고자 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을 택하는 것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인기가 없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보다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일시정지 표지를 보고 속도를 줄이다가 천천히 지나가는 것은 90퍼센트 순종이 아니다. 이것은 일시정지 표지에 대한 100퍼센트 불순종이다. 강단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게 말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폼을 잡는 것은 완전히 거짓된 행위이다. 우리는 교실에서 배운 것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결하려 한다. 우리는 마치 새 학년이 시작되면 학생들이 교사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이 과목을 쉽게 패스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을 주님께 여쭌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합격점은 얼마인가? 65퍼센트의 진리가 합격점일까? 진리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완전히 진리가 아니면 완전히 비진리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절대성은 다소 생소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합격점은 100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상대주의에 젖어있다. 매우 적은 누룩일지라도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리와 거짓 혹은 정직과 편의를 날마다 선택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이것은 마치 정지표지처럼 빈번히 나타난다. 우리가 완전히 멈추기로 작정하기 전에는, 그리고 진리와 정직에 대해서 완전한 자들이 되기 전에는 진정한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의 진리를 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최소한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과 시키기 위해서 최소한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아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을 때에 그분의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그분의 목적이다. 전적인 진리가 아닌 것을 구하는 사람은 전적인 용서가 아닌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정죄와 절망으로부터의 자유는 낮은 곳이 아닌 높은 곳을 바라봄으로 얻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도덕적 힘과 정신의 탁월은 정지표지를 지킨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완전히 멈추고자 한 결정에 대한 열매이다. 그것들은 우리 앞에 놓인 과업이다. 우리의 직장과 침실에서, 우리의 강단과 평상시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거울 앞에서나 기도 중에 완전히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온전하게 진리를 부여잡고 진리 안에서 행하기까지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신은 전심으로 진리를 좇는 자들에게 한량없이 부어지셨다.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거짓의 영의 세력을 파하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진리 안에서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주님, 우리는 말씀만 듣는 자들이 아닌 말씀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용기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겁쟁이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남편 혹은 아내가 뭐라고 말할지 두렵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진리를 말할 때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단지 합격점만 따는 것에만 만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변혁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보다 안일한 삶을 더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을 보고자 열망합니다. 주님,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구할 때에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쁨을 드리길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에 질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기쁨과 만족을 얻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지금 이 시간 도와주세요. 성령님으로 인하여 당신의 온유하심을 보여주세요. 우리가 정지표지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버렸거나 혹은 표지를 보지 못했다면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해주세요. 주님께서 “정지”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완전히 멈춰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세요. 주님께서 “사랑”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진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대충” 그런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전적으로,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해주세요. 주님, 우리 마음이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결심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세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은혜의 지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주님의 진실과 진리와 더불어 오는 빛과 기쁨이 증가할수록 우리의 삶과 결혼생활과 교회 가운데에 있는 회색 빛을 제거해주세요. 주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심에 감사 드립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제 8 장

겸손: 진리의 길

일부를 전부라고 속이다

사도행전 5장에는 한 부부가 그들의 땅의 일부를 판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에피소드가 현세대에 일어났다면 결론은 완전히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만일 현시대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서 교회의 장로들 앞에 바쳤다면 그들은 분명히 축복과 박수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욱 존경 받을 것이다. 아나니아는 교회의 재직회원 혹은 장로 혹은 집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른 시대에 벌어졌다. 그때는 하나님의 신이 압도적으로 역사하셨던 시대였다. 오늘날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더라면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터이지만 오히려 갑작스러운 심판과 죽음이 야기되었다. 우리는 오로지 교회의 처음 모습이었던 정결과 능력과 진리를 엄격하게 좇음으로부터 너무도 멀어졌다고 의심해볼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은 우리를 예전의 높은 영적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신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1-5)

 

아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굉장한 액수의 돈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들이 죄를 저지른 것은 그들이 인색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판 소유의 일부를 감추고서 전부를 드렸다고 말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드렸던 돈은 엄청난 액수였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다음의 질문을 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죽어야 할 정도로 잘못한 것일까? 만일 내가 그 정도로 많은 액수를 드렸더라면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드린 것과 동일하지 않을까? 실제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매우 적은 액수만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나의 소유를 다 드렸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란 말이야. 그것은 내가 헌금 바구니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넣은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다른 교인들이 내가 모든 것을 다 드린 것을 보고 나를 인심이 좋은 사람이라고 취급한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게 하면 그것은 “율법주의적”이고 “독단적”일 뿐이다. 하여튼, 우리 교회에 다니는 다른 교인들의 헌금 액수에 비하면 내가 드리는 것은 정말로 모든 것을 드린 것과 동등하단 말이야. 그 금액은 나의 전부란 말이지.” 이와 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돈의 일부를 숨긴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렸던 돈이 전부인 것처럼 속인 마지막 사람들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논리를 따라서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는 진리의 영을 통해서 진위를 분별한 것이다. 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의 탈을 벗기고서 그들을 책망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속이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성령님은 속일 수 없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비단 거짓말쟁이들만이 아니다. 그들은 도적들이기도 하다. 모든 거짓말쟁이는 도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거짓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불의하게 취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큰 은혜와 진심

아래의 구절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바로 전에 기록된 교회의 모습이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 4:32-35)

 

예루살렘 교회는 진심으로 주를 섬겼기에 그 결과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은 것”이다(행 4:33).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큰 은혜와 기쁨, 그리고 자신들의 소유를 드렸던 사람들에 의한 공유의 깊이를 맛보았다. 그들은 큰 은혜를 사모했지만 이러한 은혜와 이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진심과 연관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들은 바나바와 다른 사람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자기들의 재산을 드렸던 것을 보았다. 그들도 동일한 것을 행했지만, 실상은 겉보기에만 동일한 일을 한 것이었다. 그들은 전부가 아닌 일부를 가져오므로 능력과 기쁨과 큰 은혜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우리는 큰 은혜와 권세를 구하고 기대할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일처럼 일부분만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드린 것처럼 말하지는 않는가? 우리 모두는 모든 진리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행함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큰 은혜와 깊은 안식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단지 말이나 교리 정도로 인정해서 큰 은혜를 받고자 하고 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지만, 진실한 존재가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진리를 순종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분적이고 말뿐인 진리를 가져와서 사도적 권위 앞에 놓은 다음에 마치 모든 것을 바쳤으니 받아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수하는 정통주의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와 오순절주의가 다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적은 양을 남겨둘 수 있으며, 드린 헌금에 대해서 재삼 재사 자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우리는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진리 안에서 행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율법주의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일컬어 진리의 사람들이라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불성실과 타협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일부만 드리고서는 마치 전부를 드린 것처럼 행동해서 성령을 속이려고 하는 마음을 먹었다. 야고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약 2:10)라고 말했다. 하나의 거짓을 방관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은 모든 진리를 범하는 것이다. 진리를 99퍼센트만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인 양 제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적인 진리가 아닌 진리는 결코 진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리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다. 실로 그는 오히려 진리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인정하려 한다는 것은 괄목할만한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와 선생과 도덕적 모범으로 인정하는 것을 매우 관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관대”에 박수를 보내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구원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 갖기에 빠르다. 그들은 진리를 90퍼센트만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누가 이러한 식견을 갖고 있으면서 진리의 원수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진리의 원수로 남아 있으면서 수다한 영적 진리를 부여잡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진리 구도자”가빠뜨린 부분을 역설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큰 두려움에 둘러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진리 전체를 강조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강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진리를 부여잡음

예수님을 선지자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분을 완전히 부인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칭찬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위험스러운 거짓이며 기만이다. 당신은 예수님께 매우 관대한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면서도 당신의 마음 전체를 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

진리의 최종적인 부분이 진리와 우리의 관계를 결정지어준다.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는 성경말씀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궁극적 권위이시다. 나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믿는다. 하지만 지옥과 심판과 권세에 대한 가르침은 믿지 않는다. 예,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공의와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비극적인 일이나 개인을 지옥에 보내신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나는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개인을 지옥에 보내시는 것에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없다.”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아나니아에게 말했다. 우리가 예배의 일부와 기도의 일부와 사랑의 일부와 믿음의 일부를 드리고서 우리의 전부를 드렸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이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들었을 때에 그의 거짓이 탄로 났다. “당신은 사람에게만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만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발언하신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즉 당신의 합리화와 자기정당화와 진리를 사랑하는 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한 거짓말이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내려진 심판이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 혹독하고 가혹하게 느껴지는가? 그들이 저지른 죄의 크기와 우리의 죄의 크기를 바르게 이해하기 전에는 그들이 받은 심판은 우리에게 모욕과 신비로 남아있을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사건을 부인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들은 결코 믿음에 대한 교리들 중에서 단 하나도 반박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말로 인하여 즉석에서 심판을 받았다. 그 심판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얼마나 귀하게 취급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리의 높은 가치는 온 교회에게 증거 되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 이 일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크게 떨었다.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비단 정통신앙을 파기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일부를 드려놓고서 말하기를 전부를 드렸다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리의 하나님을 두려워함

우리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하나님의 영께서 이 세대의 거짓과 반쪽 진리에 빠진 자들을 엄중하게 대하시기를 좋아하겠는가? 예루살렘 교회 위에 부어졌던 “큰 두려움”이 우리 세대에는 없다. 이 세대는 하나님 앞에 서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거짓을 묵인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비단 진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진리의 하나님을 거룩하게 두려워하는 것만이 우리 세대에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 다음 구절들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2-16)

 

하나님의 신께서는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직면했을 때에도 여전히 큰 능력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고,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령의 능력이 결여되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때에 세우신 진리의 기준을 회복할 때에 비로소 성령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즉석에서 죽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짓과 기만을 방관하시는 것은 아니다. 심판은 갑작스럽게 내려지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내려지게 되어있다.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 20:17).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즐기고 있는 존경과 기쁨과 명성과 평안이 우리 입에 모래가 될 운명에 처해 있지는 않는가? 이것은 순간적으로 달콤한 맛을 준다. 교회 안에는 우리의 거짓된 행위를 책망할 베드로가 없다. 진리는 낮아질 데로 낮아졌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거짓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적다. “악의 없는 거짓말”과 과장된 말과 미묘한 허설[虛說]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위에서 매우 빈번히 일반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거짓의 비뚤어진 논리는 마치 진리인양 보이기까지 한다. 만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진리에서 벗어났는데도 즉석에서 죽임 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이든지, 아니면 사도행전이 쓰여졌던 시대 이후로 진리가 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의 거짓은 여전히 우리를 죽이는 것이지만, 단지 좀더 서서히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게 할 뿐이다. 속이고 취한 식물이 아무리 맛이 좋고 풍부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음식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굶주리게 된다.

모든 거짓말은 무람없는 행위이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나의 거짓말을 분별하실 수 없을 것이라고 믿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내 합리성을 하나님의 신보다 위에 두고 있다. 모든 거짓은 자기 자신을 진리보다 위에 두는 것이며, 속임 당하는 자 위에 두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높거나 동등하다고 여기면서 그 사람에게 거짓말할 수는 없다. 거짓된 행위는 속임 당하는 사람보다 나를 높게 만든다. 환언하자면 거짓은 상대방을 나보다 낮게 여긴다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님께 거짓을 말하므로 자신들을 하나님보다 높아지게 한 것이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고 말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을 말하는 자였다. 그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또한 그는 교만의 아비이기도 하다. 그의 타락은 자기찬양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에까지 올라가려고 했을 정도로 뻔뻔스러운 자였다. 그의 교만은 그 자체가 거짓이다. 그는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 훨씬 높은 존재가 되고자 했던 자였다. 교만과 기만은 태초부터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들은 공통된 본질과 근본을 지니고 있다. 아나니아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한 것은 그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모든 거짓은 거짓의 아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나니아의 거짓말은 그의 마음에 거짓의 영의 존재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거짓은 거짓의 아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로부터 영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거짓의 영의 역사는 아나니아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행 5:4)라고 물었다.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했으며, 아나니아는 그 일을 마음에 두었다. 아나니아는 결백한 희생자가 아니다. 그는 사탄과 완전히 한통속이었다. 그는 거짓을 환영했고, 그것을 기꺼이 동의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다가와서 인류 역사상 첫 거짓말인 “네가 정령 죽지 않으리라”라고 한 말을 듣고 속았던 것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결백하지는 않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동등하여지고자 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따서 먹었다. 모든 거짓은 자아의 주장에서 비롯되며, 자신을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까지 높이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탄의 역사이다. 교만과 무람없음은 거짓의 아비를 초청하는 방법이며, 마귀를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그들의 마음 밭은 합리화와 정당화가 뿌리를 내리기 쉬운 매우 비옥한 땅이다. 일단 이러한 논쟁거리들이 마음 속에 가득하게 되면 모든 거짓을 마음에 두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사탄은 이러한 마음 속에 들어와서 거짓을 말하게 하기 위한 기회를 찾고 있다.

 

 

왕의 성품

마귀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에 그는 예수님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진실되신 분이셨다. 예수님 안에는 거짓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커지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예수님에게는 진리의 한계를 넘으려고 하는 욕망이 없었다. 그분이 하나님께 모든 한계를 넘겨드린 것은 그분의 진정한 겸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에 대한 본질이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겸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3-7)

 

이 구절들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에 대해 묘사한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높이고 거만하게 될 수 있는 모든 기회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아들의 신분’을 높아지게 하려 하는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주님의 성품과 그의 나라의 특성을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내려오신 이후로 결코 자신을 다시 높이신 적이 없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분의 겸손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그 겸손은 완전하다. 그분은 한번도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의 명성과 이미지를 지켜줄 마지막 끄트러기까지도 거부하셨다. 그분은 거절과 오해의 지고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전적으로 진실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간청해서 자신을 구원하거나 높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분은 자기를 따르던 추종자들의 얼굴에 비춰진 어두운 혼란과 실망도 그분 자신을 구원하도록 자극할 수 없었다. 십자가의 치욕과 굴욕은 최후의 시험이었다. 십자가 상에서의 시험은 그분의 겸손의 완전성과 그분의 성품의 보증이었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말했다.

사람이 복음의 모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지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우리가 실로 왕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높이느냐에 달린 것도 아니고, 우리 예배당의 웅장한 건축 양식도 아니고, 우리 사역의 범위와 번영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는 것과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표적은 예수님 안에 있던 성품을 우리가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복음의 성격의 가장 작은 부분만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순복음”(Full Gospel)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겸손: 우리의 필요 — 하나님의 공급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빌 2:3). 사람이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다툼이나 허영을 버리는 즉시 그는 진실한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거짓과 기만이 그의 마음 가운데 거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본위와 허영이 매우 강력하고 미묘하고 영구적인데 어떻게 해서 내가 이 권고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한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 아니다. 엠플리파이드 성경(Amplified Bible)은 이에 대해서 “일하라. 개척하라.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하라. 진정으로 신중하게, 양심의 유연함을 가지고, 시험을 받지 않게 주의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한다. 진실된 존재가 되라는 요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기를 죽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가 지녀야 할 겸손의 근원과 기초가 된다는 것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부지런히 이루는 것은 이기적인 태도와 교만의 미묘함의 일견을 보게 해주며, 진리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두려움과 떨림은 성도로 하여금 성령님의 정지신호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은 성도로 하여금 모든 몸짓과 목소리의 억양과 얼굴 표정을 더욱 조심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우리 안에 계신 분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떨리게 하신다. 그러나 그 떨림은 우리를 마비시키거나 실망시키는 종류가 아니다. 이 떨림의 궁극적 근원은 소망의 근원이기도 하다. 진리의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를 진실 되게 성취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요구를 이룰 수 있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공급은 당신이 마음 속으로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라고 믿는 동안에는 숨겨져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겸손과 마음을 품을 수 있고, 삶의 순수함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자기 공로와 선행이 가미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은 가장 교만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을 나의 힘으로 모방하고 닮아가려고 하는 시도는 가장 지독한 교만이며, 가장 헛되고 불손한 거짓이다. 그것은 자기 찬양이며, 겸손에 대한 오해일뿐이다. 그것은 겸손이 오로지 하나님의 신께서 가져다주실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바울이 말한 바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6)라고 하는 말씀을 외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이다.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이루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은 궁극적인 겸손을 공급하신다. 이 겸손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며, 우리를 진실된 사람들이 되게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 질 수 없다. 다만 진리가 우리를 겸손케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자들로 만드시며, 진실한 존재로 만드신다. 자신으로부터의 최후 구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겸손케 하거나 진실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오게 된다. 우리는 오직 진심으로 이것을 바라고 지향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 무결하게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를 더 겸손케 하고 진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일어서기를 원하며, 높이 들리기를 원하며,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하나님의 길은 항상 낮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듯하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되게 만드시는 것은 우리를 겸손케 만드시고 우리 영혼을 낮추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신성으로부터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내려오셨다. 그분은 요단강으로 내려오셨으며, 침례 받으셨으며, 불명예스러운 치욕을 당하셨으며, 거절 당하셨으며, 약함을 체휼하셨으며, 벌거벗으셨으며, 굴욕적인 죽음을 맛보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모든 거짓은 자기를 스스로 높인다. 교만은 오로지 높아지기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진실한 존재가 되어지려거든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말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모든 진리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위로 올라가려거든 먼저 아래로 내려가라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9,10)

 

위로 올라가고 싶거든 먼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만일 다른 길로 들어가면 그는 도적이다. 당신은 담을 넘어서 들어갈 수 없다. 당신은 지성과 감성과 영적 경험을 사용해서 신적 진리를 얻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진리를 소유하는 자일뿐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아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겸손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분을 따라간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를 더욱 겸손케 하셔서 모든 진리에게로 인도하신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진리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려면 예리한 지성과 가장 민감한 정신을 충족케 할 충분한 통찰력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들은 오로지 겸손으로 말미암아 자비롭고 순수한 존재로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동일한 마음을 갖는 것은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또 하나의 비하가 있다. 그것은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승리의”(triumphal)라는 단어는 1마일이나 이어진 번쩍이는 자동차 퍼레이드와 오토바이 에스코트와 휘날리는 깃발들과 모든 종류의 화려하고 웅대한 의상들을 연상케 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의 어린 새끼를 타시고 감람산 밑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그 나귀 새끼는 너무 어려서 예수님이 타시기 전에 어느 누구도 탔던 사람이 없었다. 이 장면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인다. 한 성인 남자가 어린 나귀 새끼 등에 올라탔다. 그분의 다리는 거의 땅에 끌릴 정도였다. 이 장면은 왕께서 예루살렘에 오시는 장면이다. 예수님께는 금이나 화려한 것들이나 나팔이나 의자 가마도 없었다. 마태는 이 장면을 일컬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4,5).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바 대로 예루살렘 거민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입성을 크게 기뻐했다(슥 9: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그분과 그분의 나라를 배격하게 될 것을 인하여 서서 슬퍼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했으며,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멸망과 심판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그분의 능력보다 그분의 겸손을 더 희구함

하나님과 성령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우리가 처음으로 주목하고 반응한 것은 성령님의 능력과 활동이다. 우리는 “호산나!”라고 소리치는 데는 빠르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서 찾으시고 선택하셨던 겸손한 나귀 새끼가 주는 의미를 인식하는 데에는 너무 느리다. 우리는 뒤늦은 후에야 어린 나귀 새끼가 등장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린 나귀 새끼에 대한 기사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왕의 오심에 있어서 불가분의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분은 가장 완전한 겸손의 마음 없이는 교회 혹은 세상에 오실 수 없으시다. 이것은 그분의 본질이며, 그분의 이름이다. 당신은 성령님께서 이 세대의 예루살렘을 내려다 보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화려하게 오시지 않고 겸허하게 오시는 이여, 오만과 위세로 오시지 않고 나귀의 어린 새끼를 타고오시는 겸손하신 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말하기 전에는 내가 태초부터 지니고 있는 능력과 권세로 다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주님의 성령과 능력을 한량없이 받게 된다면 우리는 겸손히 그분을 환영하고 열망하며 존숭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분의 능력보다는 그분의 겸손을 더욱 희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겸손히 영접하지 않으면 우리집이 황폐하여 버려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어떻게 세상에 진실과 진리를 위해 필사적으로 오시겠는가? 그분은 자신이 거하실 수 있는 몸이 필요하시다. 그분은 예수의 영을 실어 나를 육체와 피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너무 분주하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능력에 확신 있는 교회, 즉 세상을 능가하는 독단성과 화려함과 부유함을 소유한 교회를 고대하신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분은 매우 다른 모습의 교회를 원하신다. 그분이 천한 나귀 새끼를 가장 닮은 교회를 원하신다. 우리가 나귀 새끼처럼 겸손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그분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거짓의 중심이 교만과 오만이라면 진리의 중심은 겸손이다. 부정직은 교만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한다. 부정직은 오로지 자기 독단과 자기 섬김과 자기 찬양으로 인하여 존재하며 표현되어진다. 거짓의 영은 그것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육체를 찾는다. 거짓의 영은 오만하고 무람없는 사람 속에서 편히 지낼 수 있다. 진리의 영은 이러한 육체에 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축복할 수도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겸손과 진리 안으로 인도 되었기 때문에 성령님을 한량없이 받게 되었다. 이 패턴은 초대교회 때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모든 축복은 그것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겸손한 사람들에게 임한다. 만일 우리가 갈보리 언덕으로 가는 길가에 밧줄에 매여 있던 그 나귀처럼 날마다 인내로써 주님을 기다리면서 성실히 섬긴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정확한 시간에 부르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경에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더라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계 21:2, 9-11, 18-27)

 

성경 속에서 교회에게 주어진 마지막 환상은 모든 보석으로 장식된 성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이 성은 수정같이 맑고 어두움이나 안개가 조금도 없는 곳이다. 빛은 이 교회를 밝게 비춘다. 세상은 이 교회를 선명히 볼 수 있다. 이는 교회가 스스로 높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며, 홍보 활동이나 미디어 활동을 잘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가 투명하고 진실되며 빛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교회는 자연의 빛이 필요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성을 비추는 빛이다. 그리고 빛을 비추는 등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영으로서 겸손하시며 온유하시다. 그분은 보좌에 앉으셔서 교회를 살아 있는 빛으로 채우시는 분이시다. 만국이 다니게 될 교회의 빛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인하여 오게 된다. 그곳에는 더러운 것이나 혐오스러운 것이나 거짓이 파고들 수 없다. 어떠한 보석도 그 자체에게 빛을 편향 시켜서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빛이 성의 일부가 되게 하지도 않는다. 어린 양의 신부는 점 없고 흠 없다. 그녀는 간사함이 없다. 그녀는 겸손하고 진실되다. 그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보석을 준비하시고 계신다. 그분은 자녀들이 진리 안에 행하는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실 때까지 계속하실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단순히 “정직한” 자들이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빛으로 충만하여지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다. 우리는 이 목표점에 우리의 시야를 고정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을 바라보고, 우리를 투명한 보석같이 만드는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빛과 영광과 진리를 발산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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